#아주작은것 #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현북스
아주 작은 것을 보는 방법
아이와 함께 아침을 먹던 그날도 내가 좋아하는 카페의 머그잔으로 커피를 마셨다. 아이는 식탁 위에 있는 내 컵을 보고는 “결국은 그 컵을 샀네?”라고 말했고, 나는 “왜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카페의 머그잔을 사는지 알 거 같아.”라고 말했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편은 “난 그런 거 하나도 이해 안 돼.”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작년 친구네 가족과 함께 여주의 한 곤충 박물관을 간 날은 야속하게도 날씨가 좋지 않았다. 아이들과 함께 박물관 구경을 하고 나오니 굵은 빗방울이 예사롭지 않게 떨어지고 있었고, 우리는 결국 비를 피할 곳을 급하게 찾게 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 정원이 딸린 큰 카페가 있었고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2층으로 된 카페는 층고가 높고 전면이 통유리창으로 되어 있어서 날씨가 좋은 날이면 깊숙이 햇빛이 들어올 것 같았다. 1층에는 다양한 책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는데 아이들은 그곳에서 자유롭게 읽고 싶은 그림책을 골랐다. 2층의 넓은 소파 석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빵과 음료를 마시며 비가 선물한 그 시간을 느긋하게 즐겼다. 그림책을 읽다가 지루해진 아이들은 통유리창 앞에서 요란하게 내리는 비를 구경했다. 그곳을 나서면서 나는 남편에게 다시 또 오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1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한글날에 아이와 무엇을 할지 고민하던 나는 영릉을 가자고 제안했다. 어디를 가든 한 가지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남편의 성격을 알기에 근처에 있던 그 카페에 가자고 선뜻 말하기 어려웠는데 그날따라 유독 센스를 발휘하던 남편이 카페에 가보자고 먼저 말을 꺼냈다. 다시 찾은 그 카페는 여전히 좋았고, 나는 카페의 로고가 새겨진 머그잔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집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날이면 아침마다 그 잔에 커피를 마시며 기억 속은 카페의 분위기를 소소하게 느껴본다. 내가 머그잔에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던 걸 공감하지 못한 남편에게 “그걸 알지 못한다니 시시하군.”이라고 한마디 던졌다.
나는 주변 환경에 참 무디다고 생각하는데 타고난 기질이 아닌 하나의 방어 기제처럼 작동하는 것을 느낀다.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시달릴 때면 모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새 나의 감각 회로는 외부 환경을 차단하면서 사는 삶에 익숙해졌고, 제법 편리한 능력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친구들은 나에게 “너처럼 눈치 안 보고 살면 참 편할 거 같아.”라며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사는 게 좋은 걸까? 나는 소설을 읽는 게 참 어렵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에 몰입해 보려고 억지로 감정을 이입하면 한 권을 다 읽고 나서도 여운을 느끼지 못한다. 애써 감상을 얘기해도 ‘내가 느끼는 감정들은 오롯이 나의 감정일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독서 모임을 하게 된 계기도 잃어버린 나의 감수성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렇게 삼 년 동안 모임을 이어가던 중 책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다가 나도 모르게 울컥해서 눈물이 나고 말았다. 진짜 내 감정을 느낀 순간이었다.
어느 책에서 “내부의 빛이 외부의 빛과 만나다”라는 플라톤의 말을 보았다. 이문장은 나에게 ‘나는 아이에게 어떤 빛이 되어줄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남았다. 아홉 살이 된 아이와 아직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림책을 읽는다고 하면 다들 놀란다. 남편 역시 언제까지 다 큰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줘야 하느냐고 묻는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그 시간은 단순히 글자를 읽어주는 시간이 아니다. 각자 바쁘게 하루라는 시간을 보내다가 겨우 서로의 마음이 맞닿는 시간이다. 하루는 아이와 그림책을 읽다가 “너도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어?”라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는 지금 행복한데 그걸 왜 생각하느냐고 말한다. 그렇게 아이에게 또 하나 배운다. 아이는 내가 잊고 살았던 아주 작은 것을 알아차리게 한다. 에바 알머슨의 〈기쁨〉이라는 그림을 좋아하는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어쩌면 아주 작은 것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작은 것은 무심코 지나쳐버릴 만큼 미미한 존재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을 때만 알아차릴 수 있는 감각이 깨어나 자기만의 독창적인 빛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것이 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작은 것들을 보기 위해서는 자신의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그림책이 그런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내가 본 것들을 아이에게 이야기한다. 아이와 나는 그렇게 밤마다 그림책을 읽으며 서로의 빛을 주고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