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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쓰는 사람 14화

바람

#유산 #아민 그레더 #책빛

by 수키
내 삶의 마지막에 남기고 싶은 것은?


나는 죽을 때 묘비명에 ‘삶에 머무르다, 가다’라고 남기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삶에 머무른다는 것, 자기 삶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은 내가 살아가면서 가장 지키고 싶은 것이기도 하면서 아이에게 남겨 주고 싶은 유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기에는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있기에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진다. 독서 모임에서 연말이 되면 다 같이 새해의 목표를 이야기하곤 하는데 나는 ‘지행합일’이 목표라고 했다. 좋은 책들을 읽으면서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그러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해에는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실천하는 것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좁히고 싶은 마음에 다소 거창한 표현을 하고 말았다. 〈그림책으로 철학하기〉수업에 참여하기 전까지 나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그 확신이 사라졌다. 말로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하면서 행동은 그러지 못했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보니 어렵지 않게 떠오른 것이 있다. 나를 향한 믿음. 나는 자신을 믿지 못한다. 나의 행동이 변화 앞에서 소극적인 것도 어찌 보면 믿음이 부족해서일 수도 있다. 이 사실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에 묻어두고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것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삶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언젠가는 마주해야 한다.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나를 사랑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천천히 하루하루를 보내면 정말 내 삶에 머무르다 간다고 떳떳하게 묘비명에 적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의 아이에게도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어린이책을 읽던 독서 모임의 신입 모둠 활동을 마치고 새로운 모둠을 선택해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하던 대로 그림책을 읽을 수도 있고 새로운 모둠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는 말에 여러 모둠을 참관해 보고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결정한 것은 장애인식 개선 동화를 읽는 모둠이다. 새로운 것을 해보자는 마음이 컸고, 무엇보다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선생님들과 함께 모둠 활동을 할 수 있다는 말에 조금 더 의미 있는 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나는 새로운 것,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아이처럼 흥분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그날 밤 아이와 그림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하게 될 모둠에 대해 말했고, 아이는 희망으로 부푼 나를 응원해 주었다.


내가 아이에게 자주 하는 말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꼭 해보라는 것인데, 하고 싶은 일 앞에서 용기가 없어서 노력하지 않았던 내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순간은 좋아하는 것을 위해 애쓰고 있을 때인데 그런 어린 시절의 기억이 별로 없다. 니체는 우리의 정신에는 낙타의 정신, 사자의 정신, 아이의 정신이 공존하고 있는데, 창조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아이의 정신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무거운 자신의 짊을 가지고 살아가는 낙타의 정신으로 살아갈 때 그것을 부정하는 사자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어렸을 때는 낙타의 정신을, 지금은 사자의 정신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나는 ‘나’로 살아왔는데 그런 ‘나’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은 이제까지 살아온 나의 삶 전체를 부정당하는 것만 같아서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하면 더 이상 외면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받아들이고 부정하면서 그것의 힘을 이용해 살아가려고 한다. 의식적으로 아이에게 마음을 물어보는 이유도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선택할 수 있는 연습을 하기 위함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주변 환경을 고려하게 되고 선택했을 때의 상황을 미리 걱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는 경험을 하지 못하면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행동이 먼저가 아닌 마음이 먼저여야 한다. 바라는 것이 있을 때 행동해야 한다. 아무리 사소한 경험일지라도 그것은 내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그 경험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알 수는 없지만 내 삶에 풀어내는 일련의 과정이 이루어졌을 때의 즐거움을 알면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이것은 아이에게 전하는 바람인 동시에 나에게 하는 바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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