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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쓰는 사람 15화

그냥

#내가 예쁘다고? #글_황인찬 #그림_이명애 #봄볕

by 수키
평가란 무엇일까?


오랜만에 전에 살던 동네에서 아이의 유치원 친구들을 만났다. 키즈 카페에서 놀다가 아이스링크장으로 스케이트를 타러 가기로 했는데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이 스케이트를 탔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들떠 있었다. 그런 모습이 귀여워 대화에 끼어들고 싶었던 나는 한 아이에게 “스케이트 잘 타?”라고 물었고, 신나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아이는 당황하며 “아니요, 잘 타는 건 아니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내 질문 때문에 아이가 당황했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탈 줄 아느냐고 물어봤으면 될 것을 왜 ‘잘’이라는 말을 붙였을까 자책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비슷한 일이 또 일어났다. 아이는 영어 학원을 다니는 형을 자주 집에 데리고 왔는데 그날은 형이 자신이 가져온 스케이트보드를 보여주며 “저 스케이트보드 탈 줄 알아요!”라고 말했고, 나는 또 습관적으로 “스케이트보드 잘 타?”라고 물어봤다. 그 아이는. “아, 아니요! 잘 타는 건 아니고 그냥 안 넘어지고 타는 정도예요.”라고 말했다. 다시 한번 내 실수를 직감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내 질문이 좀 이상했다고 사과했다. 나는 왜 ‘잘’이라는 말을 붙였을까? ‘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비슷한 상황은 나에게도 종종 발생한다. 배우기를 좋아하는 나는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 있으면 알고 싶고, 알고 싶어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찾으러 다닌다. 내 삶은 대체적으로 그렇게 흘러왔다.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차곡차곡 쌓아 올린 공든 탑. 그것이 내 인생이다. 하지만 이 탑이 흔들릴 때가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얘기할 때면 사람들 반응은 대부분 “그럼 그거 잘하겠네.”라는 말로 되돌아온다. 그런 말을 들을 때면 활짝 피어 있던 마음이 움츠려 든다. “제가 제 입에서 고기를 씹을 때 홍시 맛이 났는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 드라마의 이 유명한 대사가 딱 내 마음을 대변해 준다. “그냥 좋아서 배웠을 뿐인데, 잘하냐고 물으시면……” 나는 할 말이 없어진다.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해야 잘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 누구보다 잘해야 하는 건지 등등의 기준이 내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든다. 나는 어떻게 해야 잘한다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싫어서 어느 순간부터 숨기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내가 관심 있는 것에 대해, 내가 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말을 하고 싶지 않아 졌다. 책이 좋아서 독서 모임을 시작했고, 읽은 책들을 기록하고 싶어서 SNS를 개설했다. 계정에 대한 소개 글을 어떻게 적을 까 고민하다가 ‘그냥 책이 좋아서, 그냥 남기고 싶어서’라고 적었다. 나의 성격과 고민이 잘 드러난 문장이다. 소심한 나는 누군가에게 드러내 보이는 것에 자신이 없다. 좋아하는 것을 한껏 좋아하고 싶은데 세상 눈치가 보인다.


이제 체르니 100번 진도를 나가는 아이가 학원에서 숙제를 줬다고 했다. 피아노 학원에서 숙제를 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무슨 숙제냐고 물으니 자신이 좋아하는 곡을 하나 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집에서 여유로는 시간을 보낼 때면 디지털 피아노에 저장되어 있는 연주 곡을 듣곤 했는데 아이는 그중에서 18번 곡을 가장 좋아했다. 나는 그 기억이 떠올랐고 아이에게 추천했다. 자신이 그 곡을 연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걱정이 많았던 아이는 두, 세 번 학원에서 수업을 받고 집에서 더 연습하기 위해 악보를 챙겨 왔는데 이제는 악보 외워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아이에게 ‘잘’한다고 칭찬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가만히 들어주면서 영상을 찍기도 하고 아이와 밥을 먹으면서 아이가 연주한 영상을 틀어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신의 연주를 듣던 아이가 뿌듯해하는 게 느껴졌다. 피아노 치는 재미에 푹 빠진 아이는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다면서 내가 쉬고 있을 때면 그 곡을 연주해 준다. “잘한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꾹 참고 정성껏 연주를 들어주는 것으로 내 칭찬을 대신한다.


황인찬 작가의 《내가 예쁘다고?》의 그림책 속 남자아이는 ‘예쁘다’라는 짝꿍의 말이 오해였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제는 예쁘다는 것이 무엇인지 온몸으로 알게 되었다. 나도 그 아이처럼 주변 사람들의 말 한마디에 쉽게 울고, 웃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말이 아닌 스스로에게 해주는 말의 힘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잘’에 기대고 싶지 않다. ‘그냥’ 살아도 되는 삶, 그 안에서 힘을 얻어서 살아도 되는 삶, 그래도 괜찮은 삶으로 내 시간을 살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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