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 #마거릿 와일드 글 #론 브룩스 그림 #파랑새
누가 가장 어리석을까?
《여우》를 읽은 첫날 나의 질문은 “셋 중에 누가 가장 어리석을까?”였다. 집에서 다시 그림책을 읽고 내가 한 질문의 답은 까치라고 생각했다. 나는 까치가 가장 어리석게 느껴졌다.
불이 난 숲에서 날개를 다친 까치를 구해 준 개는 까치의 곁을 지켜준다. 까치는 날개를 다쳐서 더 이상 날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한 슬픔으로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그런 까치에게 개는 자신 또한 한쪽 눈이 보이지 않는다며, 그래도 산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말하지만, 그 위로가 까치에게 가 닿을 리가 없다. 그래도 개는 자신의 본성대로 숲을 뛰어다닐 수 있으니까. 까치는 원래 하늘을 나는 존재다. 야생의 까치는 날지 못하면 살 수 없다. 그런 까치에게 개는 자신의 등을 내준다. 까치는 개의 등에서 스스로 날 수는 없지만 그럭저럭 나는 기분을 만끽하고 개에게 애착을 느끼게 된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불청객이 찾아온다. 평온하다고 느낀 일상에 작은 돌 하나가 던져졌다. 그들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개는 바다와 같은 포용력으로 여우를 받아들이고 어떠한 근거도 없이 처음 본 여우를 좋은 아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까치는 낯선 여우가 탐탁지 않다. 까치는 “여우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애”라고 경계한다. 여우는 깨진 둘의 틈을 파고들었고 경계심이 많았던 까치는 결국 정말 하늘을 나는 기분을 알려준다던 여우를 따라나선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까치는 여우에게 버림받게 된다. “이제 너와 개는 외로움이 뭔지 알게 될 거야.” 여우는 왜 그들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을까?
여섯 명이 모여 하나의 그림책을 읽었는데 여러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나하나 모아보니 신기하게도 하나의 단어에서 만난다. 편안함. 누군가에게 편견을 갖게 되는 이유도, 장애를 극복하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는 이유도, 새로운 환경에 적극적으로 변화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도 ‘편안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여우는 그들에게 ‘외로움’을 겪게 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둘이었다가 혼자가 되면 불편해지니까. 혼자가 된 개와 까치는 여우가 던져준 ‘외로움’이라는 삶에서 무엇을 느끼게 되었을지 궁금했다.
자신의 감정 상태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불편하다. 명상을 처음 시작할 때 제일 먼저 느끼는 감정은 우울이다. 요가 선생님은 이것을 명현현상이라고 말해주었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내면을 잘 들여다볼 수 있다고 했다. 불편한 감정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성장의 단초가 된다. 나는 요즘 계속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편한 대로 살다 보니 편한 것에 익숙해졌고, 적당히 편안한 정도에서 그럭저럭 모든 것을 해결하고 있는 일상을 보내고 있는다. 그런데 왜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인지 의문이다. ‘편안한 것들을 선택하면서 살아왔는데 왜 불편할까?’ 스스로에게 던진 이 질문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나의 불안한 마음은 내가 무엇을 해서도, 안 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의 기본값인 것을 한 달여간의 시간을 보내면서 깨달았다. 나의 구체적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습관적으로 ‘경제적인 독립’이라고 말한다. 이미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내가 ‘자유’를 꿈꾼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이 지점이 요즘 내가 좌절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이라는 것을 알았다. 현실과 꿈이 어긋나는 지점. 글을 쓸 때면 더 이상 넓혀지지 않는 나의 생각들을 현실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더욱 내가 있는 현실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를 답답하게 하는 틀에서 벗어나려면 이 상황을 깨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무엇부터 시작할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스스로를 질책하며 모든 문제의 원인에 대한 책임을 나에게 돌렸고, 그렇게 불안의 늪에 빠졌다. 그림책 《여우》 속의 개도, 까치도, 여우도 모두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각각의 차이는 있다. 개는 그것을 극복한 존재로 보이고, 까치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삶에서 불안을 느끼고, 여우는 혼자라는 외로움에서 불안을 느낀다. 그림책을 읽으면서 불안이라는 불편한 감정은 결국 무언가를 하게 되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불안을 이기지 못한 까치는 여우를 따라나서고, 여우는 그런 까치를 버리면서 결국은 셋 다 혼자가 된다. 여우가 어디론가 떠나고 홀로 남겨진 까치는 개를 찾으러 떠난다. 조심조심, 비틀비틀 자신의 두 다리로 여행을 시작하게 되는 까치의 모습을 보며 그가 마주할 현실을 응원하게 된다. 하루하루를 자신의 힘으로 버텨내야 하는 까치는 이제부터 진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여우는 까치가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준 고마운 존재일 수도 있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어》에서 주인공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에게 묻는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기대할까? 인문학 강연을 들으러 간 날, 강사는 인생에서 나락을 만났을 때 그 삶을 버텨낼 수 있는 힘은 희망을 버리지 않을 때 온다고 했다. 정말 희망이 있으면 불안한 삶도 버텨지는 것일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희망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것 같지만 무턱대고 희망을 바라기 전에 눈앞의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고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까치는 다시 날지 못할 것을 알지만 현실을 부정하면서 거짓된 희망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까치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그리고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에게 질문해 본다. 나는 내 삶을 제대로 기대하고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