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현 작가의 《천하 걸작 한국 영송전》이 시작한 지 2일이 지났다. 현재 예술의 전당 앞에서는 1인 시위가 진행 중이며, 녹색연합에서 그의 전시를 향하여 죽음의 사진전 이라며 비판 중이다. 또한 전시 지원을 맡은 미술과 비평에 많은 이들이 비난의 글을 올리고 있다. 그의 기사를 찾아보면서 매일신문에서 전시 소개 기사를 찾게 됐다. 매일신문에서의 인터뷰에서 장국현 작가는 “이 세상에 선보인 적 없는 신령스러운 소나무들로 영적인 기운이 서려 있는 작품”, “산의 정기와 소나무의 맑은 기운을 담아내기 위해 새벽에 산에 올라 찍은 사진”이라고 설명한다.
앞서 언급했던 예술의 조건이 될 수 있는 기준 두 가지를 소개했다. 조지 디키의 분류적인 예술과 평가적인 예술이었고, 또한 이 예술에 대한 윤리성에 대한 문제로 수면 위로 올라오고 있다. 현재 녹색연합에서 생명의 운동을 표현하기 위해 소나무를 베었다는 모순을 비판하면서 생명이 아닌 죽음의 사진전이라고 말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디키의 기준에서 봤을 때, 평가적인 예술에 여론의 영향이 크게 미칠 것 같다.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을 경우에는 장국현 작가의 말마따나 영적인 기운을 느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미 일파만파 그의 만행이 퍼져버려 평가적인 예술에 대해서는 마음 한편에 꺼림칙함을 벗어버릴 수 없을 것이다.
분류적인 예술의 관점에서는 권위가 있는, 즉 예술계에서 인정하는 범위에 속한 작품이나 작가를 말한다. 여기서 애매한 부분이 있는데, 장국현 작가의 전시는 현재 '미술과 비평'의 지원을 받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미술과 비평은 05년부터 시작된 회사이고, 잡지의 퀄리티는 인정받고 있는 회사이다. 또한 디키가 말한 예술계의 범위 안에 드는 것이 '미술관'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예술의 전당이 아무리 전시 거부의 뜻을 밝혔음에도 법적으로 전시를 지속하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강제적으로 예술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것이다.
장국현 작가는 전시를 통해 자신의 행위에 대한 반성을 하겠다며 말한 바가 있다. 한국에서 도덕성이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이유가 무엇일까? 먼저 녹색연대에서 언급한 죽음의 사진전이라는 표현을 돌아보자. 죽음의 사진전은 우선적으로 소나무를 베어버린 행위를 상징적으로 비판한 표현 이리라. 또한 법계에서 자본 손실에 대한 우려로 전시를 진행할 수 있게 손을 들어준 행동은,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 기준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는 생명을 화폐가치로 보면서 그 자체를 사물화 한다. 이는 생명을 가치로 죽이는 살해 행위이다. 이에 대해 장국현 작가에게만 이러한 사조에 대한 책임을 물 수는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물화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지만, 자본주의를 유지를 하는 것도 우리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순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장국현 작가가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긴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관료제에 대한 문제나 정의에 대한 문제를 언급할 때마다 나오는 사람은 '한나 아렌트'이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에 대한 말을 한다. 이는 나치의 아이히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나온 개념이다. 이러한 비판은 관료제 안에서 합법적이고 합리적으로 악을 행할 수 있는 모습으로부터 시작됐다.
홀로코스트라고 불리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 너무나도 쉽게, 펜을 서랍에서 책상 위로 올리듯이 결정됐다. 아무런 도덕적 가책이 없이 말이다. 많은 이들은 그러한 결정을 한 사람에 대해 흉악하고 더러운 이미지를 투영한다. 그러나 나치 장교인 아이히만은 옆집의 푸근한 아저씨의 모습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말한다. '나는 주어진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이런 모습을 아렌트는 격렬하게 비판한다. 악의 모습은 항상 변화하고, 생명이라는 가치를 쉽게 여긴다.
장국현 현상을 우리는 쉽게 여길 수 없다. 그의 모습은 아이히만이 서류 정리하듯 학살을 허용했던 것과 다르지 않은 행동이다. 그는 합법적으로 전시를 하고 있으나, 그에 따른 책임에 대해서는 전시로 말하겠다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정부가 옳지 않은 일을 하고 있었다면, 그 일을 집어던지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장국현 작가도 동일하다. 옳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전시장을 박차고 나와야 할 것이다.
예술에 대한 도덕성 논란은 동양철학의 영향 아래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문화에서 아름다움과 도덕과의 연관성은 무시될 수 없다. 아름다움이라는 미의 표현은 단지 시각적 즐거움만 충족하는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전인적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지닐 때, 다수가 경험했던 도덕성에 합당할 때 사용되곤 한다. 그렇기에 그의 언행에 대한 논란과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장국현의 사진은 예술의 범위에 들어간다. 그의 사진은 디키의 분류적이거나 평가적인 예술에서 합당한 작품이다. 또한 법적으로도 합법적인 전시다. 그의 결과적인 작품 자체는 불법의 범주에 들어서지 않고, 그의 행동만이 불법의 범주에 들었으며 벌금형에 대한 책임뿐이다. 그의 전시는 한 성당에 대한 후원금을 모으기 위한 시작이었다. 그러나 해당 성당은 후원금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고, 그의 전시의 방향은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정말 우리 강산의 아름다움을 알리고 싶은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