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골절이라는 증상이 있다. 특정 부위에 계속 충격을 받으면 어느 순간 뼈에 실금이 간다. 사고를 당한 것도 아닌 데다, X레이 검사를 해도 진단하기 어렵다. 그냥 '어라, 좀 아프네. 무리했나...' 하고 넘어가거나 멍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몇 주 쉬면 알아서 뼈가 붙지만, 모른 채 방치하면 완전 골절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요샌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트라우마나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MZ세대들도 일종의 피로골절을 만성적으로 겪고 있는 것 아닐까.
요새 쏙 들어간 표현 중 하나가 '헬조선'이다. 한때 젊은 사람들은 "지옥 같은 '헬조선'에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 차라리 이민을 가고 싶다"라고 외쳤다. 그런데 우리나라를 한때 강타했던 '헬조선'은 어느 순간―정확히는 촛불 혁명 이후로 점차 사라졌다.
지금이 천국이라선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이제 진짜 헬이라서"라고 결론을 내는 사람들도 꽤 많다. "바보짓을 한 친구를 'X신'이라고 놀릴 순 있어도, 진짜 장애인에게 X신이라고 하는 건 모욕이다" "원래 지옥 안에선 지옥을 볼 수 없다" "예전엔 그냥 다 같이 불만을 토로하면서 뭔가 해소하는 느낌이었는데, 레알 헬이 되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비관적으로 들리는 이야기들이 곳곳에서 오간다.
'헬조선' 시절에도 그랬지만, 어르신들께선 늘 "요새 애들은 약해 빠져서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부러진다"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다. 왜인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우린 당신들처럼 목숨을 건 전쟁이나 정치적 폭압을 견디지도 않았고, 가난으로 땅을 파먹을 필요도 없었다. 경제가 꽤 발전한 뒤 태어나 고등교육도 많이 받고 해외 경험도 숱하게 해 봤다. 그러니 "헬조선을 외치는 건 진짜 맵고 쓴 맛을 못 봐서"라며, 다른 어려운 나라들의 현실과 비교해보라고 권유(?) 받는 것일 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궁금하다. 심각한 충격을 겪은 뒤에도 괜찮다는 그분들은 정말로 그렇게 강인했던 건지 말이다.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의 무언가를 잃거나 다치고서도 '그러려니' 하며 견디는 것은 아닐까?(아마 한국인의 한이나 화병의 근원일지도 모른다.) 혹은 그들이 강인함을 유지할 수 있도록 누군가가 보이지 않는 노동을 대신해주었을 가능성도 높다. "요새 애들은 너무 약해"라고 하는 사람은 정작 본인이나 주변인이 이미 부러진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우리가 그들처럼 강력하게 '얻어맞으며' 크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멀쩡함을 보장해주지도 않는다. MZ들은 비록 강도는 약할지언정 빈도로 따지면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충격을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군대 내 구타, 영유아 학대, 직장 내 성폭력, 열악한 환경에서의 산업재해… 한 땐 쉬쉬하며 숨겨졌거나 별 것 아니라 무시당했던 모든 일들이 이젠 매일같이 뉴스화 되어 이어진다.
내가 직접 당했든, 뉴스로만 전해보든, 괴롭기는 매한가지다. 내가 얼마든지 과거에 겪을 수도 있었거나 미래에 겪을지도 모르는 일들이니까. 게다가 이런 직간접적 위협을 버티는 와중에 내 또래의 누군가가 코인으로 대박을 터뜨리고, 앉은자리에서 부동산 시세차익을 수억씩 버는 것까지 실시간으로 생생하게 보고 있자면 괴로움은 기하급수적으로 가중된다.
그렇게 피로골절이 온다. 작은 것들에 조금씩 끊임없이 얻어맞는 상황에서는, 아주 약한 타격 하나조차도 뼈를 완전히 부러뜨리는 의외의 한 방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예민해지다 보면 작은 것도 여유 있게 넘기기 어려워진다. 무기력하게 멈춰있지 않고, 점점 더 공격적으로 변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도 동의할 수 없고("도대체 그게 누구한테 좋다는 거죠?"가 된다) 사소한 것들에 목숨 걸지 말자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MZ세대들이 공정에 집착하는 이유, 기존 조직(이를테면 노조)들의 집단행동 양식에 반발하는 이유도 여기에 맞닿아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흔하게 쓰이는 'PTSD'라는 표현 역시 그냥 넘길 게 아니다. 원래는 사고나 고문 같은 극도의 충격을 겪은 뒤 지속되는 정신적 질병을 뜻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너무 가볍게 쓰이는 말이 됐다. 친구들이 자기를 빼놓고 카톡방을 팠다는 하소연에는 "듣기만 했는데도 PTSD 올 것 같아"라는 공감과 위로가 이어진다.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평을 들은 웹드라마 <좋좋소>에는 "직장인 PTSD 유발"이라는 칭찬(?)이 붙기도 한다. 비록 다소 무례하고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젊은이들이 얼마나 다채로운 상황을 구체적인 충격으로 인식하고 공감하는지 그대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사실 난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 같은 K콘텐츠의 대성공도 조금은 씁쓸하다. 많은 '윗분'들은 기록적인 관람자 수에만 주목하며 "한국은 이제 헬이 아니라 선망받는 나라가 됐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 콘텐츠의 내용은, 화려한 발전상이 아닌 끔찍하고 적나라한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헬'에 가까운 모습에 여전히 많은 이들이 격렬하게 공감한단 걸 고스란히 반영한 셈이다.
부러지는 줄도 모르는 새에 부러지는 뼈처럼, 뜨거운 줄도 모르는 새에 입는 저온화상처럼, 많은 젊은이들은 '헬조선'이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대신, 서서히 그리고 확실히 다치고 있다. "우리 땐 정말 힘들었다. 지금은 좋아진 거다"라는 말보단. "우리 때도 힘들었지만, 지금도 힘들겠구나. 너희도 우리도, 괜찮아지도록 노력하자" 정도가 참 적당하다. 세대 간에 "누가 더 고통스러웠나"로 경쟁할 필요는 없다.
참고
[탐사플러스] "한국 떠나고 싶다"…젊은층 '헬조선' 증후군(JTBC, 2015년 9월 17일)
[도시살롱] 정의로운 예민함의 세대, 화이트불편러(매일경제, 2019년 5월 18일)
[오형규 칼럼] 그 많던 '헬조선' 비난 다 어디로 갔나(한국경제, 2021년 3월 4일)
좋은 게 좋은 거? 전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는데요(시사인, 2021년 7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