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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집 Jun 12. 2023

어떤 날의 잔상이 나를 사로잡을 때,

그것은 행복이었나보다

  

과일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과일 중에서 그나마 먹는 건 망고, 멜론, 체리, 복숭아, 바나나와 같은 것들.

배와 사과, 딸기는 좋아 하지만 꼭 먹어야 하는 것들은 아니다.


과일을 잘 먹지 않는 나에게 아빠는 늘 배나 사과를 깎아 포크에 찍어 입에 넣어주었고, 나는 싫다면서 하나만 먹을게 이러곤 했다.

그런 아빠가 사라지자 나에게 배나 사과를 깎아 입에 넣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설거지하다 문득 예전에 엄마 아빠가 내게 해주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신혼 시절 아이가 나 하나밖에 없었을 때 아빠의 하루 일당이 천원쯤 되었다고 하는데, 겨우 돌 된 말도 하지 못하는 아이가 바나나만 보면 그렇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바나나를 달라고 했단다.     


그 당시 바나나는 매우 귀한 과일이었고, 한 손이 아니라 바나나 한 개가 백 원쯤 했었다고.

그런데도 첫아이라 한 번씩 사주곤 했다고 했다.

엄마 아빠 둘이 내가 바나나를 먹는 모습을 그렇게 구경만 했었다고 한다.

실수로 내가 떨어뜨리는 것을 주워서 겨우 맛보곤 했었다고.      


아무 데도 기댈 곳 없는 부부가 아이 하나의 기쁨을 위해 일당의 10분의 1을 들여 산 바나나를 먹는 딸의 얼굴을 구경만 했다고 하니 나는 정말 사랑받았구나 싶다.   

  

아빠는 매번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너는 첫째이니 동생들보다 엄마 아빠랑 오래 살지 않았느냐고, 그러니 첫째는 더 사랑받은 만큼 책임감을 느끼고 동생들을 잘 돌봐야 한다고.(엄마 아빠는 각각 오남매의 첫째들이었다.)

바나나 때문은 아니지만, 나는 더 오랜 시간을 보냈기에 그에 맞는 답을 내 부모에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나나에 얽힌 에피소드는 하나 더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이사를 하면서 전학을 가게 됐다.

작은 학교인데다 학생 수도 적고, 이웃들이 모두 아는 사이라 엄마는 내가 빨리 적응하길 바랐는지 생일 때 파티를 열어줬다.


반 친구들이 모두 우리 집에 와서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노래를 부르고, 즐거웠던 것 같다.

매해 엄마는 생일 때마다 그렇게 해줬기에 나에게는 인상적이지 않았던 그 생일파티가 다른 친구들에게는 기억에 남는 일이었나보다.     


스무 살 무렵 동창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있었는데, 한 친구가 내게 했던 말.      


“내가 네 생일파티에서 바나나를 처음 먹어봤잖아.”     


아, 그 바나나.

내 친구의 기억 속에 남은 바나나.

나는 그 친구에게 바나나라는 기억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내 딸이 좋아하는 샤인머스캣, 망고, 체리, 복숭아를 어느 날부턴가 가격에 상관없이 아이가 먹고 싶다고 하면 사서 온다.     


며칠 전 체리가 나왔길래 집어 들자 집 앞 마트 사장님이 아직 가격이 비싸다고 하는데도,      


“우리 딸이 좋아해서요.”     


이러곤 사서 싱글벙글 들고 왔다.

아이가 맛있다며 먹는 얼굴을 보면,

아 그때 우리 엄마 아빠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구나 싶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이가 하나였던 시절.

아들이 어릴 때 꽃등심을 먹고 싶다고 해서 식당에 갔는데, 1인분에 4만 원이 넘는지라 셋이 앉아 2인분을 시키곤 열심히 구워서 아들 입에 쏙쏙 넣어주었던 기억도 있다.

그때는 서로 배가 부르다며 아이 입에만 넣어주고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것도 추억이고, 그 순간도 행복이었다.     


그런 순간의 기억이 우리를 버티게 한다.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로, 사랑하는 존재로 온전히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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