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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집 Feb 23. 2023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I 늘 애쓰며 사는 사람과 늘 즐겁게 사는 사람 I     


그는 늘 내게 “뭘 그렇게 애를 쓰면서 살아? 뭘 그렇게 자신을 증명하려고 해? 그냥 대충 재밌게 살아”라고 말했다.     


나는 드라마 대사 하나를 놓치는 것도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영화를 보다가 옆에서 말을 걸어 대사를 놓치면 화를 내는 사람이었다. 예민하다고 보기에는 정도가 심했다.

그 사람이 보기에는 나는 참으로 쓸데없는 일에도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람이었고, 즐겁게 살 수 있는데도 늘 모든 상황을 심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말하자면, 나는 100%를 소화해야 비로소 그것을 ‘안다’라고 겨우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무엇에 대해 내가 정확히 다 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영역은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은 80%, 아니 50%만 알아도 “그거 내가 다 아는 거야, 더 볼 필요가 없어. 모르는 거 있으면 나한테 물어봐. 다 알려줄게”라며 허세를 부리는 경우도 있다.     


그건 그 사람이 인지하는 ‘안다’라는 영역에 대한 자신의 태도다.

나에게 인지된 ‘안다’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와는 다르다.     



I 결국 선택의 문제다 I


그렇다. 어쩌면 결국 선택의 문제다. 삶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태도가 어떠하냐에 따라 어떤 삶은 응축되기도 하고, 어떤 삶은 확장되기도 한다. 넓고 얕게 세상을 두루두루 둘러보는 사람도 있고, 좁고 깊게 오롯이 한 곳을 바라보고 세상을 외길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은 어쩌면 저렇게 살 수 있는 걸까 싶을 때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문을 쿵쿵 닫는 일, 

시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일, 

타인의 말을 주의 깊게 듣지 않는 일, 

쓰레기를 책상 위에, 온 집안에 두고도 평온한 사람들.     


별일 아닐 수도 있지만, 난 저런 사소한 것들에 감정이 일어나기도 한다. 과하다 싶을 만큼 단계를 거치지 않고, 거침없이 화를 낼 때도 있다. 이런 일들의 반복이 감정의 단계를 차근차근 거치지 못하게 한다.     


그럴 때면 상대는 또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내 집에서 문도 쿵쿵 못 닫고 사냐, 

뭘 좀 하다가 보니 좀 늦었네 미안, 

그거 뭐였더라, 그때 뭐라고 했었지? 

에이~ 다시 물어보면 되지 뭘~      


이러곤 나를 예민한 사람으로 만든다. 항상 별일이 아닌 것처럼 넘기다 보니 그 사람은 늘 즐겁다. 심각하고 예민한 일은 내가 처리하면 되니까.     

나의 화를 불러일으키는 일들이 일어나면, 늘 힘겹다. 그 파장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기복이 나를 오래 붙들기 때문이다.     



I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가? I     


우리가 살아가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는 일들이 많다. 하지만 늘 옳고 그름을 갈라놓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덕의 범주 내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맞다.

나의 방식이 이렇다고 해서 상대도 나와 같은 태도와 선택을 하라는 것은 어리석은 강요다.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한 나의 선택은 거리 두기이다. 나의 감정을 일으키는 것들로부터의 거리 두기는 의외로 장점이 크다. 타인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나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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