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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이너리 Oct 22. 2022

#7 꿈을 꾸다

인생의 새로운 분기점을 맞이하다.


드디어 한 남자는 남은 인생 동안 올인할 수 있을 만한 원대한 꿈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상에 가치와 편의를 제공하는 영향력 있는 IT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를 세우는 것,
매우 추상적이고  엉성하지만 그가 이루고 싶은 자신의 꿈에 대한 첫 정의였다.

『2년 호주 생활 막바지에, 공장 숙소 안에서』


 11개월간의 아프리카 봉사활동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온 한 남자는 진로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아프리카 해외봉사를 다녀오고 휴학 중인 대학을 복학할 생각이었지만 아무 생각 없이 입학한 대학을 4년 동안 다닌다는 것이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한번 시작한 모험, 끝을 보자는 생각에 다시 한번 해외로 나가보기로 결심한다.


 아프리카에서 봉사활동했을 때는 교회라는 울타리의 보호를 받으며 생활을 이어갔다면 이번에는 스스로 해외에 가서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자유롭게 여행을 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던 한 남자는 주변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당시 유행하던 워킹홀리데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다.


워킹홀리데이(Working-Holiday)는 글자 그대로 청년들을 대상으로 해외에 나가 관광/취업/어학연수 등을 병행할 수 있도록 협정 체결 국가에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해주는 제도이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발급받으면 기본적으로 해당 국가에서 1년간 체류가 가능했고 1차 산업이 발달한 호주와 뉴질랜드의 경우, 일손 부족 현상을 해결하고자 농장에서 6개월 일하는 등 특정 조건 충족 시 비자를 1년 연장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청년들에게 최대 2년간 일과 여행,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비자이다.


 워킹홀리데이를 지원할 수 있는 나라는 약 20개국 정도 되었으나 한 남자는 워킹홀리데이 국가를 선택하는데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영어를 사용하고, 한국의 75배나 되는 면적에다, 다양한 민족이 섞여 살면서  여러 문화가 공존하고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나라이며 결정적으로 원한다면 2년간 머물 수 있는 나라였던 호주를 선택했다.


 아프리카에서 한국에 도착한지 불과 5개월 만에 호주로 날아갔다. 호주를 가기 위해 많은 준비를 하지는 않았다. 5개월 간 고향에 머물면서 아버지 일을 도우면서 워킹홀리데이 대행사에게 지불할 비행기표와 잠시 머물 숙소와 농장 소개 비를 마련했고 워킹홀리데이 비자발급을 하고 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돈을 조금 모아놓기는 했지만 호주로 가기 전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있는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면서 돈을 다 써버리고 호주에 도착하니까 500불(약 50만 원)이 남아있었다.


 한 남자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이미 아프리카에서 기본 영어를 갈고닦았고, 호주에서 일자리도 많다고 들었기 때문에 굶어 죽을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워킹홀리데이로 해외에 나간 사람을 워홀러라고 불렀는데  그의 워홀러 생활의 시작은 일반적인 다른 워홀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에서 워킹홀리데이 대행사를 통해 농장 일자리와 숙소를 마련했고 농장 일자리와 숙소를 제공하는 사람은 현지에서 일하는 한국인 관리자였다.


 현지 한국인 관리자는 농장에서 중간 관리인(슈퍼바이저)으로 일하면서 농장주를 대신해서 사람을 뽑고 일을 시키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자신이 관리하기 편한 한국인을 데려와서 일을 시켰고 그 한국인들은 관리자가 제공하는 숙소에 머물면서 호주 생활을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몸은 호주에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한국인들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일하면서도 한국인들과 같이 일했고, 숙소에서도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했으며 주말이나 여과 시간에서 한국인들과 어울렸다.


 특히 모든 관리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일반적으로 호주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1순위가 같은 한국인 관리자나 고용주였다. 해외에서 같은 민족을 만나면 서로 아껴주고 잘해줄 것 같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많았다. 영어도 못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외국 땅에 와서 의지할 곳이라곤 같이 일하고 사는 사람들뿐인 한국 워홀러들은 그들의 착취 대상 1순위가 되었다.


 자신들도 한낱 호주 농장주에게 월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일 뿐인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한국인들 사이에서 그들은 일을 주선해주고 해고하는 인사권이 있었고, 호주에서 오래 살아온 경험 때문에 콩글리쉬 커뮤니케이션 능력도 어느 정도 있었으며, 숙식을 해결할 임대 하우스를 관리하는 집주인이기도 했다.

한 남자가 첫 호주 생활을 시작한 곳은 퀸즐랜드 주에 속한 번다버그라는 도시였다. 번다버그는 워홀러들 사이에서 농장 일이 힘들기로 명성이 자자한 지역이고 그중, 가장 악명 높았던 토마토 농장에서 토마토 따는 일을 시작했다.


한국 면적의 75배나 되는 넓은 땅덩어리만큼이나 호주 농장 또한 그 스케일이 남달랐다.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지 위에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 넓이 정도의 간격으로 토마토 나무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일꾼들은 허리에 바구니를 매고 할당받은 토마토 줄에 들어가 토마토를 따서 바구니를 채우면 되었다. 농장의 규모가 큰 만큼 토마토 따는 포지션만 30명이 넘게 일했는데 대부분이 한국사람이었다. 토마토 따는 일은 3개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각 그룹마다 관리자(슈퍼바이저)가 인력들을 관리했다. 슈퍼바이저 3명 모두 한국사람이었으며 서로 농장주인의 신임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듯 보였다.


 그들은 워킹홀리데이 대행사들로부터 소개비를 받았고, 자신들이 운영하는 임대 하우스에 워홀러들을 머물게 함으로써 숙박비를 받았으며, 농장에서 성과를 내면 월급 이외 성과급도 챙겼다. 워홀러들이 농장에 오래 머물면 머물수록, 일을 더 많이 하면 할수록 돈을 벌었기 때문에 농장에서 일을 잘 못하는 사람들이나 조금이라도 쉬는 모습을 보이면 윽박지르고 소리치기 일쑤였고 농장일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서도 자신들이 만든 숙소 룰을 강요하며 이를 따르지 않았을 경우 폭풍 잔소리를 일삼았다.


 한 남자가 보기에 그들은 그저 탐욕에 눈이 멀어버린 폭군들 같았다. 힘든 호주 생활을 오랫동안 해오고 생존해왔던 것이 그들을 저토록 악착같이 살게끔 만들었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이해해보려고 했지만 보면 볼수록 그들은 워홀러들을 자신의 울타리에 머물게끔 길들이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에서 자신이 마치 그 사회에서는 왕처럼 군림하는 자신이 뭐라도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고 그것에 도취된 듯한 모습이었다.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워홀러들에게 이곳만큼 잘해주는 곳도 없고, 돈을 벌 수 있는 농장을 찾기 힘들 것이라며 겁을 주며 다시 생각해보라고 회유를 하기도 했고 이미 떠날 결심을 한 이들에게는 차갑게 돌변하며 차별대우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다른 워홀러들에게 호주 생활의 현실을 하나도 모르는 멍청한 선택이라는 둥 정치질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떠날 생각을 못하도록 세뇌시키기도 했다.


 물론 모든 한국인 관리자들이 저렇다고 일반화하는 건 옳지 않다고 그는 생각했다. 한 남자도 2년 동안 호주에 살면서 많은 한국인을 만나고 관리자들을 만났는데 그중, 좋은 사람들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다른 워홀들의 얘기를 들어보기도 하고 한국인 관리자들과 직접 만나보고 일을 해 본 결과, 많은 한국인 관리자들이 탐욕에 눈이 먼 폭군과 같은 유형이었다.


 그리고 불행인 건지 다행인 건지, 셀렘과 기대가 가득한 마음으로 호주로 향했던 한 남자는 한국인만 가득한 곳에서 폭군과 같은 한국인 관리자들과 첫 호주 라이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3개월 동안 토 나오도록 토마토만 따고 있었다.


 그곳은 마치 현대판 노예제 같았고 인간 사회를 축소해놓은 축소판 같았다.

모든 권력과 재산을 가진 농장주라는 왕이 있었고, 그 왕의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평민인 슈퍼바이저들이 있었으며 슈퍼바이저들이 만든 울타리에서 양육되고 죽어라 일만 하는 노예와 같은 워홀러들이 있었다.

슈퍼바이저들의 워홀러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만행이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아도 왕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산을 더욱 늘려주고 확실하게 일처리 하는 슈퍼바이저를 묵인할 수밖에 없었고 슈퍼바이저들이 워홀러들에게 더 못살게 굴고 괴롭히고 길들일수록 그들의 지갑은 불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될 수밖에 없는 사회의 어두운 한 면을 보는 듯했다.


 사실 보이는 모습이 이럴 뿐이었지 근무 환경은 나쁘지 않았다.

운 좋게 토마토가 한참 무러 익어갈 시즌에 일을 시작했고, 당시 그 토마토 농장이 풍년이었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화로 약 80-100만 원 정도의 돈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남자는 어부 아버지 밑에서 어릴 적부터 바닷일로 단련된 일머리와 일근육 때문에 농장일을 빨리 적응했고 누구보다 빨리 토마토를 딸 수 있었다.

그래서 슈퍼바이저들에게 미움을 사진 않았고 다른 워홀러 동료들과도 트러블 없이 잘 지냈다.

그리고 토마토 시즌이 끝나더라도 번다버그에 일은 넘쳐났기 때문에 농장일 구할 걱정도 없었다.


 하지만 한 남자가 기대하고 상상하던 호주 생활과는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농장 생활 대부분을 한국인들과 밥 먹고, 잠자고, 일하고,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

몸만 호주에 있었지 한국에서 생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다른 워홀러들보다 호주 생존 능력이 조금 우위에 있다는 점을 악용해 몹쓸 만행을 저지르는 슈퍼바이저들 밑에서 계속 생활하다가는 그들에게 다른 워홀러들처럼 길들여지고 물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 남자는 3개월 차에 접어들 무렵 한국인 슈퍼바이저가 만들어놓은 울타리를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막상 벗어나기로 결심을 하려니 겁이 나고 두려운 건 사실이었다.

호주에 인맥도 없고, 영어도 아프리카 11개월간 배운 것이 다였고, 호주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당장 머물 곳부터 일자리 찾는 것까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배부른 노예가 되느니 배고픈 집시가 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그는 토마토 농장 시즌이 끝나는 즉시 이곳을 떠나겠다고 통보했다.


 자신들로 하여금 돈을 불려주고 일도 열심히 하는 좋은 노예였던 한 남자가 떠난다고 하자 그들은 그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술자리에서 호주의 현실부터 그곳이 얼마나 좋은 일자리가 넘치는 곳인지 설명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꾸준히 일하고 돈을 모으면 1~2년 후 한국으로 귀국할 때 얼마나 모아갈 수 있는지를 설명하며 장밋빛 미래를 설명하며 그를 잡아보려 했지만 그곳에서 도저히 자신이 원하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던 그는 단오 했고 결국 시즌이 끝나자마자 홀연히 그곳을 떠났다.


 그곳을 떠나기 전 엄습해 느꼈던 두려움과 걱정에 비해 막상 우물로 자신을 밀어 넣어보니 물은 그리 깊지 않았었다. 물론 울타리를 벗어난 후 여러 시행착오를 겪긴 했지만 익숙함을 벗어던진 그는 누구보다 자유로웠고 소중한 경험과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호주에서의 2년을 짧게 요약하라고 한다면 내 인생에서 가장 자유롭고 평화로웠으며 2년간 꿈을 꾼 것 같은 시절이었다고 종종 말하곤 한다.


 홀로 호주 이곳저곳을 여행하면서 작은 오지 마을의 카라반 파크에 머물며 호주인 농장주 밑에서 일하려고 이력서를 들고 농장 주인을 대면할 용기가 안나 그 농장 주변만 몇 시간 서성였던 순간부터, 돈을 모아 구닥다리 차를 한대 구입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무작정 호주 전역을 떠돌아다니며 여행했던 추억, 그리고 돈이 떨어질 때마다 지역 농장 일거리를 찾아 다시 돈을 모아 또다시 마음 가는 대로 여행을 떠나길 반복하던 시절이었다.


 농장이 풍년이냐 흉년이냐에 따라 돈을 엄청 벌 때도 있었고 못 벌 때도 있었으며 이곳저곳 그리고 이 농장 저 농장을 떠돌아다니며 유럽, 아시아 등 다양한 인종의 친구들을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고 여행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기도 했고 홀로 여행하면서 외로움에 사무치기도 했으며 농장일을 끝내고 끝없이 펼쳐진 초원과 농장이 붉게 물들어가는 일몰 풍경 위를 뛰어다니는 캥거루 가족을 그저 멍하니 바라보며 행복감에 젖어들기도 했다. 때론 힘들고 외롭기도 했지만 그에겐 이것조차 아름답고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는 시절이 바로 호주에서의 2년이었다.


 이렇게 한 편의 행복한 영화와 같은 호주 생활도 거의 끝나갈 무렵 한 남자는 세계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유명한 멜버른 도시 인근 지역의 닭 공장에서 호주 말년을 편하게 보내고 있었다. 그는 8개월 남짓 남은 호주 생활을 이곳에서 모두 보내려고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집시 같은 떠돌이 생활은 할 만큼 했고 한국 사람에 대한 향수도 조금 느끼고 있었고 한국에 돌아갈 것을 대비해서 한 곳에서 오래 일하며 돈을 모을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닭 공장은 호주인 고용주가 운영하는 공장이었고 한국인이 관리자로 있었다.

급여는 호주의 고용법에 따라 정당하게 받을 수 있었고, 일하는 숙소도 호주 첫 농장과 비슷하게 한국인 관리자가 관리하는 한국인들만 사는 집이었다. 농장에서는 대부분 따는 만큼 페이를 받는 성과 중심의 일만 하다가 시간당 페이를 받으니까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지만 적응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닭 공장이라 힘들 줄 알았는데 하는 일도 엄청 쉬웠고 대부분 호주 노동자들과 일했기 때문에 안전관리 준수나 일의 강도도 매우 낮았다.


 속된 말로 시간당 거의 2만 원씩 받으면서 꿀 빠는 일이었다.

무거운 것도 혼자 들지 못하게 하였고, 정식 노동시간을 초과해서 일을 하거나 주말에 일하면 페이를 1.5~2배를 줘야 했기 때문에 항상 칼퇴와 주말이 보장되었다.


 한 남자는 이곳에서 호주의 끝을 보내기로 마음먹고 한국 가기 전에 돈도 모으면서 한국 갔을 때 당장 일할 수 있도록 필요한 공부와 자기 계발을 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쉬는 날과 여가시간에는 동료들과 롤이라는 게임을 하며 보내기도 하고 동기부여 영상 및 영어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나는 세계적인 석학과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나와서 15~20분간 강연을 하는 프로그램인 '테드(TED)' 강연을 즐겨 봤다.


 그리고 어느 평화로운 주말 오후에,

다시 한번 그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만큼의 큰 변화를 예고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일에 닭공장에서 일을 하고 주말에는 집에서 평화롭게 쉬고 있었던 한 남자는 한국인 공장 동료들과 게임을 몇 판 하고 방으로 들어와 내 침대 위에 누워 볼만한 테드(TED) 강연을 찾고 있었다.


 테드 강연도 주로 그나마 그가 공감하고 흥미를 가지고 볼 수 있을 만한 인문학과 비즈니스 관련 분야만 시청했었다. 테드 강연에는 테크나 과학 분야의 재미있고 유익한 강연도 많았지만 당시 그가 이해하기 어려웠을뿐더러 흥미가 잘 생기지 않은 탓에 이런 분야의 강연은 클릭조차 하지 않았지만 웬만한 테드 인기 강연을 다 보고 나서 흥미가 생길만한 여러 강연을 찾고 있을 때마다 계속 그의 눈에 들어오는 테크 강연 하나가 있었는데 그 강연은 MIT 천재 공학자이자 당시 33세의 나이에 최연소 삼성 상무가 되어 화재가 된 "파라나브 미스트리"라는 인도의 과학자의 강연이었다.


 강연 제목은 "The Thrilling Potential of Sixth Sense(재 6감의 엄청난 잠재력)"으로 카메라, 프로젝터 등 다양한 기능을 가진 목걸이 형태의 작은 디바이스를 인터페이스로 사용하여 우리의 모션과 제스쳐를 인식하여 손가락을 허공에 대고 사각형으로 만들기만 하면 카메라 없이도 사진을 찍을 수 있고, 프로젝터가 손바닥에 비춰주는 숫자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휴대전화 없이 전화를 걸 수 있는 등  노트북 혹은 스마트폰과 같은 디바이스를 사용하지 않고 우리가 인지하는 모션만으로 물리적 세계와 디지털 세계가 상호 작용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도구를 시연하는 강연이었다.


 그가 이 강연을 본 건 2015년 초였지만 이 강연이 처음 나온 시기는 2009년이며 한참 스마트폰이 상용화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스마트폰을 넘어선 미래의 기술과 새로운 일상의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강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래도 당시에는 스마트 워치 등과 같은 웨어러블 디바이스나 사물인터넷, 증강현실과 같은 기술이 상용화는커녕, 용어 자체도 들어본 적 없을 정도로 생소한 기술들이었기 때문에 그 또한 이 강연이 굉장히 낯설고 생소하게 느껴졌으나 기술의 발전 속도와 미래를 본 것 같아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던 강연이기도 했다.


 처음 이 강연을 보고 그는 전율하였다.

두 번째 봤을 땐, 그도 저 강연자처럼 기술의 혁신을 선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세 번째 봤을 땐, 저런 기술을 발명하려면 어떤 지식이 필요한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당시 그가 찾아낸 키워드는 IT라는 큰 줄기를 기준으로 사물인터넷, 웨어러블, 센서, 프로그래밍 기술 정도였다. 그리고 관련 기술을 찾아보고 필요한 책을 구매해서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IT 분야의 역사와 기술의 혁신을 이뤄내고 현재 이뤄가고 있는 사업가들의 일대기를 찾아보게 되었고 많은 영감과 감명을 받았다.  IT라는 분야의 시장과 기술 트렌드를 알면 알수록 더 그를 매료시켰고, 앞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혁신적인 기술임을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드디어 한 남자는 남은 인생 동안 올인할 수 있을 만한 원대한 꿈이 생기기 시작했다.

세상에 가치와 편의를 제공하는 영향력 있는 IT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회사를 세우는 것,

매우 추상적이고 엉성하지만 그가 이루고 싶은 자신의 꿈에 대한 정의이다.


 앞으로 한 남자를 울고 웃게 만들고 환희와 절망을 느끼게 만들었으며, 가장 빛나게 어둡게 만들었고, 자신의 모든 걸 올인하게끔 만든,

그의 인생에 파란만장한 전개와 희로애락을 선물한 '꿈'이 생긴 순간이었다.


 2년간의 호주 생활의 막바지에 결국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꿈이 생겼고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들의 정확한 목표가 세워졌다.

먼저, IT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기 때문에 관련 분야의 노하우와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IT 회사의 사업부서에 취업해서 사업 경험과 이 시장을 이해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지만 당시 그가 가진 IT 분야 지식수준과 스펙으로는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한국에 가자마자 제일 먼저 IT 제품과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공부해서 취업준비를 하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한국에 도착하고 곧바로 고향에 조금 머물다가 무작정 서울로 상경해서 국비지원 IT 프로그래밍 개발 교육 8개월 과정을 시작하게 된다.


한 남자의 꿈을 향한 실질적인 배움의 첫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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