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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선생님은 전과자

by 수리향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매일 너무나 많은 일과 적성에 맞지 않은 일과 사람들의 괴롭힘에 시달리던 나는 집에 오면 바로 쓰러지곤 했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주는 피로는 몸이 아플 때보다 더 가누기 힘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익숙한 기술들은 몸에 베여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가끔 생각나는 활동들을 할 때마다 교사들은 더 많은 괴롭힘과 일 무더기를 선물해주었고, 점점 안 좋은 소문에 시달렸다. 게다가 '교사'에 대한 나의 개념은 타 교사들과 너무 거리감이 있어서 좀처럼 그 간격을 좁히기 어려웠다.


가장 심하게 부딪친 것은 '동료 교사 참관 수업'이었다. 인문계 교사들은 소수를 제외하고는 동료 교사에 의한 참관 수업을 받고 서로를 평가한다. 일 년에 1~2번 있는 이 참관 수업을 나는 새로운 교수법을 배우고 서로 피드백하며 발전해나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 교사들은 그것에 엄청난 거부감이 있고 그냥 서로 만점을 준 서류를 꾸며 제출하는 것으로 끝내고 서로의 수업에 대한 참관을 터부시 한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내가 수학과 회의 때 '동료 참관 수업을 서류로만 하지 말자'라고 했다가 엄청난 반발에 부딪쳤다. 역린을 건드린 것이다.


'아니 왜, 다른 학교도 다른 선생님들도 다 가라(가짜)로 하는데 유별나게 그러는 거야?'

'아니 내가 이 나이 돼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해?'


동료 교사 참관 수업과 나이 든 교사 대접이 무슨 상관인지 알 수 없지만 동 교과 회의 시간에 선배 교사들이 일제히 언성을 높였고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절대 참관하지 말자로 의견이 모였다. 결국 나는 다들 반대하는 참관 수업을 혼자 실시했고, 메시지를 보내도 오지 않는 분들을 직접 찾아가 앉혀서 수업을 했다.


'선생님, 솔직히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


내 수업을 참관하던 교사들은 이런 말을 남긴 채 안티가 되어 나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의 진원지가 되었다. 회의 시간뿐 아니라 모든 시간에 나는 전염병에 걸린 사람처럼 취급되어 내가 앉는 자리 양 옆은 사람들이 벌떡 일어나 피하였다. 그 뒤 그 학교에서는 아무도 동료 교사 참관 수업을 하지 않았다. 물론 서류로는 엄청나게 활발히 이루어지고 모두 다 잘하는 학교로 기록되어 있다.


이 정도 지나자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직은 변하지 않는다. 사람은 더 변하지 않는다. 결국 변하는 나만 떠나면 저들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 것이다. 하지만 방송대는 아직 한참 남았고 내가 방송대 출석 수업이나 스터디라도 가는 날이면 일도 없는데 야근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어 눈빛을 보내는 부장과 일부러 2인분의 일을 몰아서 적성에도 안 맞는 학생부에 배치시키는 학교 관리자를 보며 나는 한숨이 다 나왔다. 마치 조금이라도 울타리를 벗어나려 하면 채찍질을 당하는 것 같았다.


'정말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지 않은 지 기회는 왔다. '부전공 신청'. 원래 있었는데 교직에 대해 어두운 내가 너무 늦게 알았다. 교육청에서는 1년에 한 번씩 과원 교사들로 결원 교사들을 채우곤 한다. 그것은 학부시절에 부전공하여 2급 정교사 자격증이 있거나, 혹은 없더라도 교사 양성과정을 통해 그 자격을 딸 수 있다. 남들이 4년을 대학교 다니면서 딴 자격증을 날로 먹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나는 정보 컴퓨터 교사가 되면 어느 교사보다도 더 열심히 할 자신이 있었다. 교무부에서 잘 안내하지 않으면 못 보고 지나칠 수 있는 이 공문을 알게 된 이후 나는 항상 9월 가수요와 11월 부전공 신청 공문을 기다리며 그것을 썼던 것 같다.


그렇게 2번인가 3번째 해에 공문을 보았을 때,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왜냐면 수학과 단위수가 축소되면서 자연스럽게 고등학교 교사가 과원이 나고 반대로 4차 산업혁명인가 뭔가 때문에 정보 컴퓨터 교사의 기근이 시작된 것이었다. 공문 하단에 박힌 '영어와 수학은 과원입니다.'라는 문구가 마치 '이번에 쓰면 될 거야'라는 희망의 메시지로 들렸다. 나는 바로 신청을 했고 과연 그 해에 나는 정보 컴퓨터 부전공 신청이 받아들여져 그다음 해에 교원대학교로 교원양성과정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편하긴 하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하면 괴롭다. 그리고 일 자체보다는 그것을 주는 '사람'들의 고의 때문에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에도 참 많이 버둥거리며 뭐라도 하고 살았다. 딱 정해진 길도 아니고 다들 '왜 편한 길 두고 여기저기 돌아다니지?'하고 궁금해할 때도 나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이제 나의 길을 찾았다. 길을 찾는 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뭐라도 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요즘 내 스마트폰에 적힌 좌우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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