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에게 새 생명을

원격 수업 대응기, 열여섯 번째 이야기

by 수리향

컴퓨터와 학생을 사랑하는 필자가 1학기 때부터 꼭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학교에서 불용 처리된 컴퓨터를 학생에게 대여하거나 기증하는 '컴퓨터에게 새 생명을' 프로젝트이다. 본교는 정보 관련 특성화고이기 때문에 매년 실습실 컴퓨터를 위해 들이는 예산도 어마어마하고 버리는 컴퓨터도 많다. 통상 학교에서 컴퓨터 본체를 버리는 주기는 5년으로, 대부분 모범적인 사용 덕분에 상태가 양호하다. 물론 5년이면 IT 장비에게는 상전벽해와도 같은 시간이므로 업그레이드가 좀 필요하긴 하지만 주변에 많은 컴퓨터 전문가들의 손을 조금씩 빌리면 기계치인 나도 버려지는 컴퓨터에게 새 생명을 부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컴퓨터에게 새 생명도 주고 컴퓨터가 없어서 실습수업을 듣기 어려운 학생에게 컴퓨터가 생겨 원격 수업을 받는데 도움이 되니 일석이조의 사업 아니겠는가?


하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 학기 초에 올해 불용 처리 예정인 컴퓨터들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이 이야기를 꺼냈으나 대부분의 부장 교사들이 고개를 저었다. '취지는 좋은데 안 될 거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는데, 2학기가 돼서 생각해보니 '취지는 좋은데 너의 능력이 안 될 거다'라는 소리의 준말이었다. 원격 수업 구축으로 나름의 능력을 보여준 나에게 2학기가 되자 대부분의 부장 교사들과 교감, 심지어 행정실까지 '좋은 생각'이라며 적극적으로 때로는 소극적으로 도움과 조언을 주기 시작했다. 솔직히 이런 일은 교육청에서도 처음이라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는데 우리 학교에서 안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까? 혼자서는 절대 못했을 것 같은 우리 학교의 '컴퓨터 학생 무상양여 사업(부제: 컴퓨터에게 새 생명을)'을 소개하고자 한다.




컴퓨터 기증, 좀 더 딱딱한 말로 '정보통신 제품의 무상양여'는 이미 가능하도록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이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할 때 행정실 주무관님은 2쪽짜리 법령을 나에게 PDF로 보내주었다. 공유재산 및 물품관리법 제79조 제3항과 시행령 제4항, 국가정보화 기본법 제34조였는데 이 법령들을 펼치고 10분 뒤 갑자기 엄청난 두통이 엄습했다. 분명 한글인데 한 글자도 이해가 가지 않고 읽어도 읽어도 '흰 것은 바탕이오 검은 것은 글자로다'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달을 뿐 머릿속은 점점 미궁에 빠졌다. 가뜩이나 원격 수업 예산 집행 건으로 고통받던 나의 눈 밑은 보지 않아도 다크서클이 5센티는 내려온 것 같았고, 시커먼 다크서클과 더 시커먼 머릿속을 헤매던 나는 일단 법령을 덮고 행정실에 전화해 '그러니깐 일단 되는 거죠?'라는 확인 전화와 함께 바로 계획서를 작성하고 부서 내의 선생님께 양해를 구해 담당자로 지정하였다.


일단 일은 추진하며 법령을 공부해야지 이걸 머릿속에 넣고 나서 하면 내 머리가 멈취서 나머지 일도 돌아가지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담당 선생님과 함께 법령을 하루 한 번씩 읽어 보고 토의하면서 점점 이게 어떻게 굴러가야 하는지 감을 잡아간 것 같다. 역시 문과 부진아에게 복습만이 살 길이던가? 아무나 주기로 했던 계획서를 수정해 법령에 따라 장애인, 기초수급자, 다문화가정으로 범위를 제한하고 가정통신문을 수정하여 전교생에게 신청서를 배포하였다.


선정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담임교사였는데 바쁘신 와중에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알아보는 발품을 마다하지 않았다. 불용 컴퓨터를 제공하는 부서에서도 컴퓨터를 임시 보관하고 연결선을 제공하는 등 모든 교사 분들이 부탁만 하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컴퓨터 포맷은 매주 오시는 유지보수업체에 맡겼는데 거의 무료 봉사 수준임에도 불구하고 깔끔하게 일을 완료해주셨고, 다른 컴퓨터에서 램을 꺼내 4+4=8기가로 만드는 작업을 제안했던 것은 담당 선생님인데 좀 고생은 했지만 하루 날 잡아서 무사히 끝냈던 것 같다. 물론 그것 말고도 법령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물품의 정보를 공문에 기재하고 불용 조서를 작성해야 하는 등 골치 아픈 일이 많았는데, 행정실의 도움으로 물품 번호와 정보에 대한 명단을 찾아 불용 조서를 무사히 작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내가 좋아서 시작한 사업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주변의 많은 도움이 없었다면 하나도 못했을 사업이었던 것 같다.(지금 생각하면 감사의 눈물이...)




그동안 컴퓨터가 없어서 원격 수업 과제를 못 했어요.


컴퓨터 무상 양여가 시작하고 한 아이가 컴퓨터를 가져가면서 한 말이다. 요즘 세상에 컴퓨터 없는 학생이 어디 있을까 싶었는데 찾아보면 다 있더라. 실습 교과가 많은 본교의 특성상 데스크톱 없이 태블릿과 스마트폰만으로 수업을 듣던 학생들은 원격 수업 기간에는 수업을 단지 듣기만 할 뿐 참여하기 어려웠다고 한다. 어느 아이는 사형제 인데 컴퓨터가 단 한대라서 수업을 듣기 정말 많이 어려웠다며 첫날 동생과 함께 컴퓨터를 수령하였다. 그동안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사정들을 가까이서 들으며 '왜 진작 하지 않았지'하는 후회가 물 밀듯이 밀려들었다. 물론 지금이라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만, 컴퓨터의 불용처리 시점이 한 두달 전임을 감안하면, 조금이라도 일찍 추진했다면 학생들은 그 한두 달 동안 좀 더 내실 있는 수업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이런 기증 사업이 법적으로 명시되어 있음에도 그동안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이유는 뭘까? 아마 컴퓨터를 그냥 기증하기에는 사양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런저런 신경 쓸 거리가 많기 때문이 첫 번째이고, 해야 할 공문 처리가 그냥 구매하는 것보다 4배는 많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예산 문제인데, 사실 수리나 업그레이드를 돈을 조금 들여서 하면 상당히 좋은 상태의 컴퓨터를 줄 수 있음에도 '외부로 유출'하는 컴퓨터 이기 때문에 학교 예산을 지출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원격 수업은 교육의 장소가 학교에서 가정 내로 이동한 것으로 학생들의 가정 내 정보통신기기를 지원해주는 것도 공교육에서 학생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교육 혜택이 아닐까?


좋은 수업 내용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업하는 교실이 집으로 이동한 이상 교육 편차를 줄이고 나아가 학생들의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길은 어쩌면 이런 정보통신 기자재를 보급하고 원활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포함이 된다고 생각한다. 교육청에서 태블릿 대여 사업을 하긴 했지만 태블릿으로 원격 수업의 과제 등을 모두 커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국 데스크톱이나 노트북이 필요한데 학교에서 버리는 컴퓨터에 아주 조금의 예산만 투입하면 정말 많은 학생들이 좋은 혜택을 누릴 수 있음에도 교육청에서는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아 아쉬울 뿐이다. 물론 무상양여 법령이 너무 까다롭기 때문에 서류 처리 등이 많은 부분이 있지만 이것도 처음이라 서류가 많았지 간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으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져갈 컴퓨터를 점검하면서 고생하신 담당 선생님과 그런 이야기를 하며 '내년에도 이걸 할 수 있을까?' 여쭈어 보았다. 담당 선생님께서는 쓴웃음을 지으며 '내년에는 안 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내년에 누가 이 부서의 부장이 되든 과연 이 엄청난 발품과 서류 처리를 감당하고 기증 사업을 실시할 수 있을까? 좋은 일을 상상하는 것은 쉬운데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용기와 도움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럼에도 그것이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도움을 아끼지 않은 분들이 있어 이 정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혼자라면 절대 못했을 좋은 일, 끝에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좋은 일 하기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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