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팔자 좋은 막내딸이었다. 아빠가 빨래하고 엄마가 요리하고 언니가 청소하는 집에서 자랐다. 그래서 결혼 후의 삶이 너무 익숙하지 않았다. 빨래도, 요리도, 청소도 나 또는 남편이 해야 했다. 주말부부라 일주일 중 이틀밖에 안 되는 같이 있는 시간을 집안일에 쏟아붓는 게 아까웠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삼시세끼 밥 주고, 때맞춰 청소해 주는 기숙사에 살던 남편에게도, 베짱이처럼 빈둥대던 나에게도 익숙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엄마는 애쓴다며 양손 가득 반찬을 해주었다. 파김치, 갓김치, 열무김치, 콩자반, 멸치볶음, 사골국, 오징어채, 장조림,... 냉장고와 냉동실이 꽉꽉 찼다. 먹을 사람도, 시간도 없다며 사양했지만 엄마 맘은 그런 게 아니라며 매번 챙겨주었다. 그렇게 반찬을 하고 나면 며칠은 기력 없이 누워만 있는 걸 알기에 편치 않은 내 마음도 모르고 남편은 넙죽넙죽 잘만 받았다.
반면 시가에 갈 땐 과일이나 주전부리를 잔뜩 들고 내려갔지만 다녀오는 길엔 대부분 빈 손이었다. 물론 맛있는 걸 사주고, 용돈도 챙겨 주지만 반찬이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평생 요리를 했으니 귀찮을법하지 이해하면서도 딸 집에 갈 때는 국도 끓이고 반찬도 챙겨준다는 걸 알고는 서운함이 커졌다. 결혼 후 살이 빠진 아들을 걱정하면서도 반찬 하나 안 챙겨주는 마음이 궁금했지만 물을 순 없었다. 나의 쪼잔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만의 찝찝함을 키워가다 문득 엄마도 이해 안 갈 때가 많은데, 하물며 30년 이상 모른 채 살던 남편의 엄마를 어떻게 감히 이해하려 했을까 생각이 들었다. 기대를 하지 말고 실망도 하지 않는 게 내가 편해질 길이었다. 가까운 본가에는 텃밭 작물을 자주 가져다주지만, 먼 시가에는 한 번밖에 못 가져간 걸 떠올리며 서운해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편해졌다. 단번에 되진 않았지만 서운할 틈이 들 때면 '나도 잘한 거 없는데 뭘' 하고 생각하기로 했다.
지난 6월, 남편의 생일이 있어 시댁에 가야 했다. 그맘때 밭에 있는 쑥갓과 상추를 따 내려갔다. 짧뚱한 쑥갓을 가지고 가니 시어머니는 된장국을 끓여 냈다. 바지락도, 고기도 없는 그야말로 절에서 나올법한 된장국이었지만 맛이 좋았다. 너무 맛있어서 밥을 두 공기를 먹고 비법을 물어봤더니 집에서 직접 만든 된장으로 끓였다고 했다. 입맛에 맞냐며 머쓱해하시더니 그리고 집에 갈 때 직접 만든 간장, 된장, 고추장을 챙겨주었다.
손에 쥔 걸 놓아야 다른 걸 얻을 수 있다는 말처럼. 팔자 좋은 며느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내려놓자 바로 반찬 받는 며느리가 됐다! 마트에서 파는 첨가물 가득한 것이 아닌 건강한 것들. 마음이 단번에 두둑해졌다. 콩이 된장이 될 만큼의 시간과 정성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아직 낯가리는 며느리는 넘치게 고마운 마음을 고작 "아유, 감사합니다~~"라는 일곱 글자에 담았다.
생각해 보면 내가 낯선 만큼 그들도 어색했을 테다. 서울 며느리의 입맛을 모르니 안전한 바깥 음식을 사주었을 테고. 인터넷 세상에 시어머니 반찬을 처치곤란 쓰레기쯤으로 여기는 사람의 글도 왕왕 있으니 선뜻 반찬을 나눠주기도 부담스러웠겠다 싶다. 그러다 좋아하는 걸 알게 되었으니 양껏 담아주었을 거다.
키우기 쉽다는 말만 듣고 심은 쑥갓은 그동안 자라는 속도에 비해 할 수 있는 요리가 적어 밭에서 방치되고 있었다. 처치 곤란 쑥갓은 시어머니의 된장 덕분에 된장무침으로도, 된장국으로도 거듭났다. 가사 노동을 귀찮아하는 내가 남의 가사노동을 당연한 걸로, 심지어는 안 해주면 서운할 일로 생각했다는 게 부끄럽지만. 전보다는 나아진 거니 위안 삼을 수밖에. 된장도, 고추장, 간장도도 벌써 다 먹었으니 또 내려가야 할 때다. 맛있게 잘 먹었다고 또 달라고 해봐야지. 철든 며느리보다는 철 모르는 며느리가 더 편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