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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May 25. 2024

질병의 유익

투병일기 에필로그

    질병에는 유익이 있다. 병과의 싸움에서 지면 인생은 끝이지만 살아남으면 아프기 전보다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정말로 사는 것처럼 살고 싶어 진다.

    다발성골수중에서 생존한 직후 나는 우울증에 빠졌다. 하지만 그 우울증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노정이었다. 망가진 나의 인생을 재건할 이유를 찾는 노정, 과거에 쌓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을 지킬 이유가 무엇인지 찾는 노정이었다.  


    내가 살아야 하는 가장 절실한 이유는 막내가 성장하는 동안 옆에서 돌보는 것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첫째와 둘째가 짝을 찾아 자신의 가정을 꾸릴 때까지 지켜보며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막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 맞은 첫 운동회에서 상을 받았을 때 벅찬 기쁨을 느꼈다.


    요즘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줄넘기 훈련부터 시킨다. 선생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알았던 막내는 선생님께 칭찬을 듣기 위해 매일 저녁 공원에서 줄넘기 연습을 했다. 10개, 50개, 100개 목표를 달성할 때마다 나는 아이와 함께 기뻐했다. 드디어 첫 번째 운동회 날이 다가왔다. 100미터 달리기에서는 4등이었다. 세 자매 중 제일 키가 큰 막내였기에 내심 달리기 상을 기대했었는데 역시나 우리 딸들은 날 닮아서 모조리 몸치구나,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그런데 1학년 전체 줄넘기 대회에서 내 아이가 마지막 1인이 되었다.



    1학년 전체가 동시에 줄넘기를 시작하여 도중에 실수하는 아이들은 그 자리에 앉고 나머지는 계속 줄을 넘다가 끝까지 남는 사람이 우승하는 것이 이 경기의 규칙이다. 귀여운 1학년 아이들이 일제히 줄넘기를 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늦게야 운동회를 보러 학교에 오고 있던 남편은 넓은 운동장에서 몇 명의 아이가 살아남아 줄넘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몇 명 중에 우리 딸이 있어서 깜짝 놀랐는데 심지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것이 우리 딸이라서 기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진작부터 일어서서 펄쩍펄쩍 뛰며 딸을 응원하고 있었다. 아이는 혼자서 계속 줄을 넘더니 한참 만에야 중지했다. 우리 딸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부모 됨의 기쁨이 이런 것인가 싶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서 아이를 응원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아이가 3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는 시 경계 지역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가 6년 동안 거주하던 삼천동 아파트가 콘크리트 숲 속에 들어앉아 있었기에 나는 점차 초록에 목말라가고 있었다. 여기에 남편의 골프 욕구도 한몫하여 골프장 뷰가 있는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놓고 있었다. 게다가 우리가 출석하던 교회가 우리의 새 아파트 근처로 이전한다는 소식을 듣게 되니 이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자마자 대전의 7 학군에 해당하는 둔산 지역을 떠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덕명동에 오니 우리 같은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이가 전학한 학교는 현충원에 인접한 곳으로, 북쪽으로 큰 내가 흐르고 있었다. 대자연의 품에 안긴 이 학교 아이들은 순진했고 선생님들도 푸근했다.  


    이사한 다음 해 봄에 큰딸이 결혼했다. 딸과 사위는 새로 지어진 우리 교회에서 결혼한 두 번째 커플이 되었다. 남편은 결혼식 2주 전부터 날씨 뉴스를 들여다보며 노심초사했다. 예식은 지하 예배당에서 하지만 피로연을 교회 마당에서 할 예정이었으므로 비가 오면 큰일이다 싶었다. 사돈댁은 강릉에서부터 일가친척을 모시고 오는데 빗길에 그분들이 불편을 겪을까 봐 걱정이었고, 다른 하객들도 결혼식을 즐길 수 없을까 봐 걱정이 되었던 것이다.

큰딸의 결혼식은 청명한 날씨에 아름답게 거행되었다.


    그러나 남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너무나 청명한 날씨에 아름다운 결혼식을 거행했다. 교인들이나 지인들이 모두 나의 병력을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시는 것이 느껴졌다. 수개월 동안 준비한 결혼식이 끝나고 나니 지칠 대로 지쳐서 둘째의 결혼식은 예식장에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에 쫓겨 신혼부부를 찍어내듯 하는 예식장의 문화가 싫어서 큰딸 예식을 교회에서 한 것이었는데, 예식장을 이용하게 되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너무 많이 한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이렇게 장인 장모가 되었고 3년 후에 둘째 사위를 맞았다. 그땐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시키면서 큰딸의 경우에 비해 얼마나 수월한지를 계속 되뇌었다.

    44개월 선고를 받았던 나는 둘째가 결혼하기까지 7년을 살아있었고, 그 후 사랑스러운 두 손녀를 보았으며, 2024년 현재 14년간 생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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