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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라 Oct 01. 2024

햇빛 같은 사람

2010년 6월 8일부터 19일까지 일기

일기 발췌_2010년 6월 8일 화요일

   

    윤지윤 집사가 보라색 노트를 선물로 주었다. 표지에는 “God Comforts You"라고 쓰여 있다.    

  

    소노 아야코의 책에서  “특히 자신의 책임이 아닌, 까닭 없는 불행에 직면했을 때만큼 인간이 크게 성장하는 시기도 없다”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일기 발췌_2010년 6월 11일 금요일 맑음.


    어지럼증과 울렁증 때문에 음식을 넘기기가 힘들다. 이런 날 서울성모병원에 갔다 왔다. 민교수는 내 컨디션이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서 이식수술 스케줄을 다시 짜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6월 25일 입원, 30일 이식, 7월 14일 퇴원이라는 원래 시간표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일기 발췌_2010년 6월 12일 토요일 비 온 후 갬.


    공주 전원주택에 사시는 권영희 권사님이 밥 한 번 해주고 싶다고 하셔서 날짜를 맞춘 것이 오늘이었다. 우리 부부만 초대받은 것이 아니고 다른 분들도 몇 오셨다. 권사님 둘째 딸과 그녀의 남자친구를 포함하여 한국인 3명과 미국인 3명이 우리와 함께했다. 권사님 둘째 딸의 영어 이름이 사라 김이고 미국인 중 한 명의 이름이 사라 앤, 내 이름이 소라라서 다들 사라 K, 사라 N, 소라, 하면서 즐거워했다.

    미국인들은 모두 비슷하게 친절하고 순진하며 유머가 있다. 난 거의 묻는 말에 대답하는 수준으로 더듬거리며 대화했다. 예방의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과 힐튼호텔 부지배인 비서,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대화가 흥미로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예솔이가 “엄마, 외국인들하고 친해지는 건 어려운 것 같아.”라고 말하여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다운 초록의 자연과 깔끔하고 세련된 실내, 맛있는 음식, 유머 넘치는 대화가 나를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게 했다.      


일기 발췌_2010년 6월 13일


    주일학교에서 쓴 예솔이의 기도문은 엄마의 머리칼이 빨리 자라기를 소망하는 것이었다. 아이는 기도문 옆에 엄마의 머리카락을 두 가닥만 그려놓았다.


    전화로 “이소라, 보고 싶다”라고 말해주는 K 박사님, “내가 궁금해서 그러지”라고 하는 이종사촌 미선이, 나와 함께하려고 애써주는 그들이 고맙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끝났습니다”라는 주치의의 말을 듣고도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다른 병원에 가서 고통스러운 치료를 계속 받게 했던  예진이(고등학생 림프종 환자) 엄마가 생각난다. 나이 지긋한 환자들 중에는 “이제 그만 (병과의 싸움을 끝내고) 쉬고 싶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와 내 가족들이 예진 엄마나 노인 환자들의 입장에 처하는 순간이 올까 봐 두렵다.

         

    남편이 내가 병에 걸린 데에 자신의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마도 관련이 있겠지”라고 대답했다. 죽어가는 마당에, 아니 살아가고 있는 마당이라도 날 위해 고생하는 남편에게 그렇게까지 밖에는 말할 수 없었을까? 나는 아직도 남편에게 복수하려는 앙심을 품고 있다. 나 죽은 다음에 눈물 흘리며 반성하는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며 살짝 통쾌해하는 사람이다, 나는.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라는 말씀은 누구에게 적용해야 하는 말씀일까?

     

    입원할 때 무엇을 가지고 갈까? 쓰던 물건은 반입 금지이고 새 물건만 반입이 허락된다고 하니 선물 받은 보라색 노트와 쪽성경, 사놓고 읽지 않은 책들, 편지지와 우표를 가지고 가야겠다. 책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컨디션이 허락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그러나 입원실에선 결국 책도, 노트도, 편지지도 다 쓸모가 없었다.)     


일기 발췌_2010년 6월 14일 월요일 맑음


    책을 읽다가 한 문장만 건져도 책값이 아깝지 않다. 소노 아야코가 마르탱 뒤 가르를 인용한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늘 건강했던 사람은 필연적으로 바보다.” 내가 덧붙인다면 “병에 걸려보고도 지혜를 얻지 못하면 더 바보다.”       

 

늘 건강했던 사람은 필연적으로 바보다

            

일기 발췌_2010년 6월 18일 금요일


    어제는 친정에서 잤다. 어젯밤 10시부터 금식한 후 오늘 아침 9시부터 입원 전 검사를 받았다. 채혈, 복부 초음파, 치과 진료, 폐기능 검사, 이비인후과 진료, 심장 초음파, 이비인후과 엑스레이 검사를 받은 후 민창기 교수에게 외래진료를 받았다. 치과와 이비인후과 진료, 그리고 혈액검사에서 문제가 있다는 소견이 나왔다.

    왼쪽 아래 사랑니가 썩어서 발치할 필요가 있다는 소견에 대해서 민교수는 꼭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혈액검사에서 나타난 간 기능 저하는 특이물질을 섭취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며 전에 안 먹던 것을 먹은 게 있느냐고 물었다. 한참을 생각해 보니 퇴원하고부터 5가지 야채 달인 물을 먹고 있는 게 생각났다. 그 말을 했더니 당장 중단하고 간 기능 강화제를 복용하라고 했다. 이비인후과에서는 고막염 소견이 있어서 먹는 약과 점이용 물약을 처방받았다. 몹시 피곤하고 긴장감 가득한 하루였다. 남편은 남편대로 지친 모습이 보여 안쓰러웠다.       


    대전에 가기 위해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갔는데 거기서 윤지윤 집사를 만났다. 열흘 만에 다시 만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잠시 귀국한 그녀를 이렇게 두 번이나 만난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일이었다. 그녀의 웃음은 햇빛처럼 내 마음을 환히 비추어주고, 늘 받기보다 주려고 하는 그 마음은 내 가슴을 사랑으로 채운다. 그녀는 내 인생의 충전기와 같은 사람이었는데 고등학생 딸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미국에 가 있어서 2년 동안 만나지 못하고 있었다. 주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그녀를 보내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부러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만나다니! 나는 누구에게 햇빛 같은 사람일까?   


 일기 발췌_2010년 6월 19일 토요일 비 온 후 갬

 

    말초 신경염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으나 식사량은 좀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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