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소리 Oct 23. 2023

중년에 마주하는 나에게

중년은 처음이라.. 나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page 1


중년의 시간을 만나면

한 번쯤은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중년이라는

삶의 나이테를 맞아

지나온 나의 인연과 삶을 정리해 본다.


나는 오래 전인 20대 초반에

첫 남자를 만났다.

상대의 적극적인 구애를 통해

사랑이라 느낀 감정을 지나

이후에는 책임을 다하는

시간을 살았다.

말 그대로 그 관계에 대한

책임을 다하려 애쓰며 살았다.


그러나 내 마음과 같지 않은 현실은

그와의 너무나 다른 가치관과

삶의 기준들에서 오는 마찰등으로

인생 최대의 쓴맛을 경험하게 했다.


사람에게 대이고 돈에 치이고

배신과 사기라는

처음으로 맞닥뜨린

비현실적인 시련들이

이전에 내가 살아왔던

순수한 세상과는 동떨어진 현실을

처음으로 마주한 시간들이었다.


사실, 그때서야 동화 속

어린아이였던 나의 자아는

치열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온몸으로 겪고 깨져가며

어른이 되는

최초의 순간들을 맞은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스스로를 책임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선택하면

그 선택에 따르는

모든 것들을 감수하는 것이다.


좋은 것이라 여겨

선택한 것들 속에는

수많은 다른 것들도 딸려 온다.


하지만 그때는 모른다.

아니 몰랐다.

좋다고 생각한 그것의 이면들

상상도 못 했던

이후의 상황들을...


 그로 인해 펼쳐지는 현실은  

드디어 선택에 대한 책임이

어떤 것 인지를 가르치며

를 어른으로 만들어 갔다.


그리고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마다 

수많은 감정의 파도를 일으켜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들거나

서럽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을 겪고 나아가면서

성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신을 만났고

세상을 좀 더 냉철하게 보게 되고

삶을 대하는 자세에도

진지함 더해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오로시 혼자서 헤쳐 가는 것!


그때부터 정말 어른이 되어간다.


아프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인연'이었다는 말밖에
맞는 단어를 찾을 수 없고
인생에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나의 아이들을
만나야 했던 그때로 밖에
다시 돌아갈 곳이 없으니
나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우리 두 아이들을 만나는
그 인연이
나의 운명이고
숙명이었고

그 숙명을
지키며 사느라 겪게 되는
많은 시련과 상처보다

더 크고 감사한
사랑을 배우게 해 준
나의 아들과 딸에게
인간대 인간으로
사랑과 존경을 보낸다.

존엄한 경이로움...
투명한 나의 아이들에게서
배운 감동의 시간들이었고

그들은..
신께서 나눠주신
복중에 복이라
시련의 무게를 견디는 것에도
반드시 그만큼의 복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나의 시련이었다는 게
이제는 참 감사하다.




상대의 열렬한 구애를

받아들이며 시작되었던

첫 번째 나의 어른사랑은

수많은 상흔을 남기고 끝이 난다.


나의 글은 지극히 주관적이다.

하지만 어차피 삶은

나의 관점이지 않던가?...


지극히 나의 관점에서

자기 객관화라는 인칭으로

삶의 순간을 되짚어 본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나의 역사를 스스로

기록으로 남기는 시작이다.


이 기록은

안타까운 지난 삶의

스스로를 위로하고

어떤 부분은 부족했던

스스로를 용서하며

잘 살아준

스스로를 격려하는

솔직한 작업이 되어

마음 안에 잠재된 지난 감정을

깨끗이 비워내는 일이다.


가벼워지면서

새로운 나를 만나는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을

시작해 본다.





그는 책임감이 없었다.


열렬한 구애로 내 마음이 열리자 

그는 조금씩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짧은 연애 후에

임신.. 아이가 생겼다.

아이를 낳는 결정 

는 망설임 없이 선택했고

그 결정에 수동적이었던 

그의 태도는

앞으로의 현실을

말해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현실감 없는

삶의 태도로 나타났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첫 남자였던 그를

지극한 마음으로

대하려 노력했다.


그가 가진 어려운 환경..

그래서 더 측은했다.

그는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신 

가여운 혼자였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자신의 성격을 이겨내지 못하는

분노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잘 생긴 외모와 언변에

귀티 나는 분위기를 풍겼기에

주변의 친구들은

그를 모두 좋아했다.


그때 나는

도도한 20대 초반 아가씨였고

세상 물정 모르는

초보 사회인이었기에

똑똑한 척했지만

순진한 숙맥이었다.


그때까지 남자의 손을

잡아본 적도 없는

순수한 아가씨.

하는 일로 돈을 벌면

엄마에게 통째로 넣어드리고

얼마간의 용돈을 받아

예쁘게 꾸미고 다니던

이쁘장한 아가씨 말이다.


사색하기와 책 읽기를 좋아하고

공부도 곧잘 했기에

상고 졸업 후 친언니의 소개로

들어간 건설회사에서

경리 근무 3년을 했다.


조그마한 건설회사에서

혼자 일하는 답답함이 싫어 

경리일을 그만둔 후엔

50인이상이 근무하는

중소기업을 찾아

직접 서류를 넣어

나름 높은 경쟁률을

뚫고 입사를 했다.

무역으로 들여오는

원재료 매입 업무를 배정받아

많은 거래처를 응대하는 일이

적성에도 매우 잘 맞았다.


사장님 이하 윗상사분들과

거래처 대표나 담당자들에게도

따뜻한 격려와 업무능력을 인정받으며

직장인으로의 성취감도

처음으로 느꼈다.


하지만 여러모로 만족스러웠던 

두 번째 직장다닌 지

일 년이 조금 넘어갈 때쯤

자금 사정으로 힘들어지더

(당시 IMF였음)

결국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하고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고 말았다.

나는 다시 새로운 직장을 찾아

이직을 야 했다.


이번엔 16:1의 경쟁률이 있던 

새 직장에 지원을 했다.

나름 더 좋은 조건을 찾았다.

리조트 사업을 하는 다른 회사와

두 곳에서 1차 서류통과 연락 후

2차 면접까지 보았다.

며칠 후 두 곳 모두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회사를 선택하여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니 얼마나 자존감이 높았겠는가?


취업 후 겸손한 태도로

일을 배워 나가며

누구보다 일 잘하는

신입이 되었다.

처음 선배들의 텃새 

어느새 호감으로 바뀌었고

월급도 많아 통장에 쌓이는

돈의 규모 달랐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월급 외에도

용돈 드리는 즐거움까지 만끽하며

수개월이 흘렀다.

매일 반복되는 그 일상이

너무나 좋았다.

차곡차곡 돈도 잘 모아갔

일도 재미를 느끼니

오래도록 그 직장에 다니고 싶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까지가

내 인생의 봄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에서 회식을 했다.

마음 맞는 20대 초반 동료들은

2차로 더 놀러 가자며 제안했고

그 무리에 이끌려

당시 나이트클럽을

처음 가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내가

그 당시 최고로 접한 유흥은

노래방이었는데

처음 간 클럽 분위기는

다소 조용한 성격의

나로선 적응이 어려웠다.


함께 간 이쁜 친구이자 동료들은

스테이지에서 춤도 추며

젊음의 매력을 맘껏 뿜어냈고

나는 그것을 자리에 앉아

지켜보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시끄러운 음악에 멘털이

힘이 빠져갈 즈음

이제 그만 가자는 나의 제안에

우리는 무리를 지어

어두운 그곳을

빠져나가려 움직였다.


한참을 걸어 나가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나의 손을

낚아채듯 잡으며

가는 길을 멈춰 세웠다.


불쾌하고 놀란 마음에 인상을 쓰며

"뭐죠?" 하고 물으니

말끔하게 생긴 한 남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아가씨 우리

토킹 어바웃 좀 합시다^^"


라며 빙긋이 웃어 보이는 것이다.


"이 손 놓고 이야기하세요!"

나는 세상 딱딱하고 단호한 어조로

그를 나무라며

불쾌함을 온 얼굴로 드러냈다.


그런 경험이 전무했던 터라

그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의 친구들과 나의 친구들은

이미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화기애애한 자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쉬이

그런 자리를 즐길 수 없어

먼저 조용히 나와 택시를 잡았다.


다녀온 친구의 얘기로

그들은 유쾌했고

내 손을 잡았던 그 남자는

나에 대해 궁금해했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왔다.


그의 친구와 만남을 갖게 된

나의 친구가 자꾸 자리를 만들어

두어 번 함께하게 되며

만나게 되자

그는 더욱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현했다.


도도하기만 했지..

6남매 막내로

이쁨만 받고 크는 동안

세상 보는 법은

도통 몰랐던 걸까...


등 떠밀 만들어지는

만남의 자리에

조건, 배경, 사람 됨됨이 등

무엇도 따져 보지 못했다.


그의 멈출 줄 모르는 구애는

망설이던 내 마음을

조금씩 파고들었고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인연이 되었다.



나의 도도함은 서서히

그 벽이 무너지며

그를 남자로 받아들였다.

순수한 마음에 드리우는

그의 존재감으로

이후부터

많은 변화를 겪게 되면서

몰아치는 폭풍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슬픈 그의 사연에

연민이 싹트

보호본능이 일었고

나 아니면

아무도 없어 외로울까 봐

그의 쓸쓸해 보이는

손을 맞잡은 시작.

 

좋았던 때가 있었겠지만

우리의 과정은

돌덩이를 이고 있는 듯

매 순간 버거웠다.

임신... 집안의 반대..

어렵게 시작한 동거.. 등등의

문제로 순탄함이 없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이가 생긴 이후

더 이상 이전의 내가 아니었다.

어디서 나오는 모성애인지 모를

강렬한 보호본능은

우리 집안의 강한 반대에 부딪히자

그대로 집을 나오는

선택으로 이어졌고

어떤 상황에서도

뱃속의 아이만큼은

지켜야 한다는

무모한 책임감을 발휘했다.

살면서 가족들 앞에서

나를 강하게 주장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나는 그렇게 파란의 삶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잘해보려 했다.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나온

나쁜 딸이었기에..

나의 배안에서 크고 있는

나의 아기가 있었기에...

그래서 더 잘하고 싶었다.


함께 살기 시작했지만

그의 일은 잘 되지 않았고

그런 순간들에

그는 자주 좌절했다.



그도 잘해보려 애썼을 것이다.

20대 중반 남자의 커리어로

가장으로서

능력은 부족해도 마음이 없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형편에 나 또한

적응이 어려웠지만

그를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나를 만나기 전 가지고 있던

경제적 문제까지 겹쳐

그의 벌이로는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만나기 전

생활하던 서울에서

나름 잘 나가 그는

하던 일이 안 좋아져

고향지방으로

내려온 상태였기에

이렇다 할

직장이나 직업 없이

주변 아는 선, 후배들과 다니며

중고차 딜러등의

불안정한 직종에 종사했다.


아이를 낳고 나는

바로 일을 찾았다.

보험설계사.. 직장 생활..

리고 얼마간의 돈을 모아

속옷 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조금씩 나태해져 갔다.

처음의 열정은 희미해지더니

생활전선 앞에 서는 건 어느새

나의 몫이 되었

현실감 없는 그의

일탈 탈선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참. . 다.

그것도 꾸역꾸역 참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점점 더 나에게 의지해 왔다.



욱 하는 성격의 그는

내가 조금이라도

언짢은 소리를 하면

있는 데로 성질을 부렸다.

그런 후에는 다시

다독이며 풀어주려고

하기를 반복하며

나의 자존감을

벼랑으로 몰아갔다.


매일을 일하고 육아하고

몸이 부서질 듯

현실을 살아가며

외박이 잦은 그를 기다릴 때는

잔인할 만큼 고독했다.

그의 생활패턴은

일반적이지 않았다.

잦은 음주와 외박을

미안해하지 않았고

그가 만나는

주변 친구들 또한

나로선 이해하기

어려운 부류였다.


그의 성장만이 우리 가족이

살아남는 길이라 생각해

배우고 싶은 걸

해보라는 제안에

그는 자격증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보낸 학원에서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그는 어떤 여자와 연애편지를

주고받으며 지낸 듯했다.

어느 날 펼친

그의 수업책 어딘가에

주고받았던 둘의 메모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하...... 이런 거였어?

내가 모르는 그것들이

도대체 더 뭐가 있을까?'

그의 가방을 뒤집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발견한

어떤 여자와 함께

바닷가 어딘가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여러 장의 사진들...


순정을 다 바친 대가 치고는

너무 허접하고 가혹했다.

마음을 다잡을 수 없을 만큼

나는 무너졌다.


공허함에 나의 마음은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런 나를 향해 그는 오히려

소유욕을 보였고

그럴수록

나는 뒷걸음질 쳤다.

그는 미친 듯이

나를 잡아당겼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목숨 같은 존재인 아이들을

협박의 빌미로 삼아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나는

마음을 꽁꽁 얼린 채

살아갔다.

그런 그를 벗어날

방법도 몰랐고

아이들을 데리고

무얼 어찌할 수단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경제적 문제가 더해져

살던 아파트를 나와

더 어려운 형편에 처해졌다.

그러자 지금껏

생계를 책임지던 나에게

그것으로 살고 쓰던 그가...

메몰차게 나를 몰아세우고

책망을 해오며

더없는 벼랑 끝으로 몰고 갔다.



살 수가 없었다.

함께 헤쳐가는 것이 아닌

홀로 선 고독감에

그의 책망까지 더해지며

심장을 짓눌렀다.


그러나 살아야 했다.

그의 폭언에 노출된 채로

점점 더 해지는 강도의 공포감에서

나는 아이들을 지켜야 했다.


내가 힘든 건 참을 수 있었지만

나의 아이들이 보고 자랄

그 모습은 견딜 수가 없었다.


부족하고 어렸던 나를

생활전선에 세워두고

그 무게를 고스란히

견디며 살아가느라

어느 부분 실수도 많았으리라.

 

하지만 단 한 번도 따뜻하게

마음으로 품어주거나

다독여주지 않은 채

의지와 책망만 해오던

그에게서 나는 이미

삶의 끈을 놓고 싶은 지경의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눈이 엄청나게 내리던 날...

나는 그를 떠나왔다.

죽을 것 같은 공포로

나를 휘감았던

그의 모든 것에서

나는 떠날 것을 결정하고

아무것도 들지 않은 채

아이 둘을 데리고

밤길을 걸었다.


무작정 걷고 또 걸었다.

그가 우리를

찾을 수 없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그는 나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사실
나는 알지 못했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받아들인 후
그가 나의 일부라고
생각했기에
모든 걸 주었다.

그래도 아깝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랑은 수많은
현실의 책임과
헌신을 요구했기에
나를 지키는 여분의 공간이
없었던 사이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는
나를 사랑했고
애틋했지만
동시에 무능했고
파괴적이었다.

나는
그가 처음이라
애틋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딱딱해졌고
감당하기
버거웠다.

결국
우리는
청춘에 만나
뜨거웠지만
함께 하지 못한
시절인연으로
남았다.

그래서
사랑에는
잘못이 없다.

열심히 살았다.
그 사랑이
인연으로 묶였던
그때에는
그가 전부인 듯
서로에게 최선을
다했음을
나는 알고 있다.

그도
나도
우리는
인연만큼
충분히 사랑을 했다.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꿈같았던
20대의
추억으로
이젠 아픈 기억이 아닌
소중한 순간으로
그 이름을 바꿔본다.

그때의 내가 있어서
오늘의 내가 있고
그를 만났기에
나의 아이들이 있고
그런 충실한 사랑을
해보았기에
더 이상 사랑에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더 이상
아픈 과거가 아니며
그것은
나의 아름다운
청춘의 한 때였다.

운명은
오만한 인간을 꺾어
겸허함을 가르친다고
한다.

일찍이
나의 삶의 소명으로
두 아이들을 만나서
지금을 살고 보니

그 운명을 만나
이만큼이나마
겸허하게 삶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내가
되었지 싶어

그 모든 과정이
이제는 정말이지
감사할 뿐이다.


갈 곳도 없고

목적지도 없이 나는

앞만 보고 걸었다.....

하염없이 내리던 그날의 눈만이

나의 마음을 조용히

어루만져 주었고

우리는 그렇게 헤어졌다.

아니 헤어질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쁘장하고 여리한

아가씨로 혼자였던 나는

아이 둘과 함께 셋이 되어 있었다.

모든 게 순식간처럼 느껴질 만큼

내 인생에 휘몰아친

최초의 태풍 후의 모습이었다.


달라진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실은 지독히도 정확하고

바쁘게 일상과 생존을

재촉했기에 오래

슬퍼할 겨를도 없이

일상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동안

강인해진 자아와

대면하는 계기를 주었다.

어린 여자에서 두 아이의 엄마로

나의 이름은 바뀌어 있었다.



첫 번째 이별 이후

여자로서 살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남자에 대한 기대도 믿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들을 지나왔다.

오로시 홀로서기를 해서

두 아이를 잘 키워내고 싶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간을 분, 초로 나누며

매 순간을 깨어있고자 노력했고

어려운 환경을 탓하기보다는

현재를 일과 공부로 채우며

미래를 바꿀 선택들을 하며

지독하게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20대 중반에 아이 둘을

홀로 키우는 싱글맘이 되었다.

나의 사회적 커리어는

세 식구 먹고살기에

턱없이 버거웠다.

어떤 투정도 부릴

생각도 여유도 없었던 터라

오히려 치열하게 살아올 수

있었다고 자조해 본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는데

돌이켜보니 나는

모성애가 강한 엄마였던 거 같다.

아이들과 함께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했고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사랑을 표현하고자

부단히 노력을 했다.


부모로서의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으려

좋은 훈육이 담긴 책들을

두루 찾아 읽으며

좀 더 나은 엄마가 되고자

애를 쓰며 살아왔는데

정말 감사하게도 두 아이들은

바르고 선한 사람들로

멋지고 이쁘게 자라주었다.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덧

불혹의 나이 40대에 접어들었다.


그간의 치열함과 부지런함 덕분에

원하는 일도 하게 되고

좋아하는 운동도 하며

멋진 중년을 맞이해

이제 드디어 탄탄한 나의 왕국이

완성되어 가는 듯했다.


그러나

또 한 번 어른이 될 기회를 주는 인생..!


몸이 아파왔다.

살만해지니 갑자기 몸이 아파왔다.

힘든 20대를 지나

치열했던 30대를 통해

일로서 성공을 맛보며

소위 잘 나가던 나에게

또다시 시련이 시작되었다.


은 그렇게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변

드라마는 또 다른

장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