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코끝찡 Oct 28. 2019

엄마의 장례식

원망의 대상이 된 나




 아버지는 아침에 계속 엄마에게 전화를 했단다. 전화를 받지 않아 아침에 가게 경산에서 대구까지 갔단다. 갔더니 엄마의 상태가 말이 아니었단다. 그리고 119를 불러 병원 응급실에 왔단다. 아빠는 먼저 동생에게 전화를 했고 동생이 나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응급실에서 검사 후 폐에 물이 찼다는 것이다. 어딘가 감염이 되어 폐까지 약해지게 된 것이다.


 "물 좀 줘..."


 아버지가 들은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물 좀 달란 말이었단다. 아버지는 물을 가지고 어머니한테 달려갔을 때 의사들에게 저지당했다고 한다. 이미 소생할 가능성이 없는 상태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물을 줄 타이밍을 엿봤을 테다. 지금의 상황도 이해할 수 없는데 의사는 아버지에게 심폐소생술에 사인을 할 것인지 물었다고 한다.


 0.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말에 그 0.1% 희망이라도 잡기 위해 동의를 하고선 아버지는 무너졌을 것이다. 어머니의 입에서 피가 분수처럼 역류하고 가슴뼈가 으스러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느꼈을 고통, 죄책감,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존재가 자신의 싸인으로 인해 지금 이 상황이 되어버린 것, 그러나 정말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다 무너지더라도 식물인간이 되어서라도 어머니의 목숨만큼은 잡아두고 싶었음은 나 역시 동의하는 바이다.


 잠시 후, 의사는 냉정하게 사망하셨습니다 하곤 돌아섰단다. 아버지는 누구를 원망해야 할지 몰랐을 테다. 손에 들고 있던 물 컵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였을 것이다. 정말 숨을 쉬지 않는 걸까? 가슴에 큰 자극이 갔기에 근육이 살짝씩 움직이고 어머니의 볼은 아직 따뜻한데 순식간에 사망자라니...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마지막 한 마디는 아마도 “미안해”였을 것이었다. 혼자 어머니를 방치했다는 죄책감, 본인이 준 신장이 문제가 생겨 이지경이 되었단 생각, 4년 전 사업에 실패하며 큰 빚을 지게 되어 힘들게 했던 것,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야밤에 온 손님을 받아 퇴근 빨리 못하고 사경을 헤매던 어머니를 혼자 방치했던 것, 죄책감에 가장 먼저 나왔을 말은 분명 “미안해” 였을 테다.




 왜? 엄마는 왜? 갑자기 돌아가셨을까? 그리고 전 날, 퇴원을 했다는데 결과적으로 일이 이렇게 될 일이었다면 의사는 퇴원시켰으면 안 되는 거 아녔을까? 의사에게 따졌다. 엄마 병간호하면서 나도 잘 아는 의사였다. 의사의 대답이 납득이 되지 않을 시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그리고 나는 의사의 대답을 듣고 무너졌다.


 "아들 곧 생일이라고 아들 챙겨줘야 한다고, 퇴원시켜달라고 졸랐어요." 


 할 말이 없었다. 그 말 때문에 나는 결국 나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원망할 대상이 의사가 아닌 내가 되고 말았다. 집에 가보니 엄마가 왜 돌아가셨는지 알겠더라. 그동안 엄마의 부재로 인해 집이 엉망이 되었고 그것이 미안해 청소를 싹 하고 아들 생일에 줄 미역을 불리고 있었더라. 그 아픈 사람이 말이다. 의사가 덩달아 말했다. 집에 보호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을 줄 알았으면 나도 퇴원 안 시켰지. 결국 엄마의 무리한 퇴원, 무리한 행동으로 인해 패혈증이 오게 되었고 엄마가 사경을 헤매던 순간, 우리 가족은 엄마 옆에 아무도 없었다. 나는 엄마의 마지막 전화를 받았을 때, 미리 대구에 내려가 있거나 아예 내려가지 못하니 퇴원하지 말라고 말했어야 했다.


 엄마는 겨우 60년도 못 살고 59살에 돌아가셨다.




 동생은 엄마 영정사진을 찾으러 집으로 갔고 아버지는 벌써부터 묫자리를 알아보러 가셨다. 눈치 없는 응급실 간호사는 나에게 응급실 비용 청구서부터 내밀었다. 같은 병원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혼자서 엄마의 염 시간, 엄마가 마지막으로 입게 될 옷, 몇 인승 버스, 그리고 관은 무슨 나무로 할 건지, 화장 시간까지... 선택해야 할 것이 천지였다.


 저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먼길 오시기 힘드십니다. 그래도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 문자 드립니다. 마음만 나눠주셔도 감사합니다.  - 대구OO병원 장례식장 발인 9월 1일


 사람들에게 보내줄 부고 문자를 몇 번이나 고쳤다. 장례식에서 보내준 샘플이 있었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고 알림 그리고 나의 모친상, 장소, 발인으로만 보내긴 뭔가 좀 그랬다. 뭔가 꼭 오라는 메시지만 같았다. 더구나 장례식장이 대구였기에 지인들이 평일날 대구까지 부르는 게 영 미안했다. 한 명, 한 명, 알림을 보내야 할 사람들을 추려 문자를 보냈다. 애매한 사람이다 싶은 사람이면 그냥 보내지 않았다.


 나의 지인만 추려야 할 것이 아녔다. 엄마의 핸드폰에 담긴 연락처에게 또 부고 알림 문자를 보냈다. 엄마의 핸드폰이 바쁘게 울린다. 일일이 다 설명해야 했다. 사람들에게 뭐라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말 끝을 흐렸다. 사람들은 다행히 눈치껏 전화를 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겠다고 했다.


 서울에서 열 분도 오지 못할 거란 생각을 했다. 그러나 백 분 넘는 내 지인들이 조문을 했다. 생각보다 내가 잘 살았나 보다. 연예인 이름을 단 조화가 여기저기 도착했다. 같이 작업했던 영화의 배우분들,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던 영화감독님들, 각종 영화사에서 조화를 보냈다. 이름 있는 배우분들도 몇몇 직접 조문을 하셨다. 친척들이 동안 나를 무시했는데 장례식만큼은 나를 좀 대단하게 보더라.


  이윽고 9월 1일, 발인 날짜가 되었다. 3일 내내 잠도 한숨 못 자 탈진해 링거를 맞고 오기도 했다. 발인식을 한 뒤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다. 화장할 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운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상하리 만큼 눈물이 나지 않았다. 눈이 메말라 더 이상 흘릴 수분이 없더라. 사람들은 나를 보고 안 울려고 애쓰는 것으로 보았다. 실은 너무 울고 싶었는데 눈물이 나질 않았다. 그것마저도 속상했다.


 엄마의 유골함을 직접 받았다. 무척 뜨거웠다. 엄마의 유골함을 꼭 안고 장지를 향하는 한 시간. 나는 3일 만에 처음으로 잠이 들었다. 엄마가 너무 따뜻했다.


엄마는 죽어서도 엄마였다.


<엄마를 안고서>


이전 02화 마지막 만남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