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꽃이 흐드러지는 계절이다. 얄궂은 마스크는 얼굴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고 하루가 다르게 확진자 수가 늘어가고 있다. 고립을 자처한 인간의 계절은 바람 한 점 들지 않는 방에서 전부 흘러버렸다. 오랜만에 밖에 나가보니 벚꽃잎이 한창 비를 뿌리고 있었다. 예쁘다.
망할 고통의 시간 동안 집에 쌓인 수십 개의 술병을 치우는 날이다. 밖에 나가지 못하는 동안 구석에 쌓여있던 재활용 쓰레기들도. 밖으로 짊어지고 나가야 할 짐이 내 몸보다 크다. 이삿짐처럼 커다란 짐을 옮기며 엘리베이터가 없는 계단을 오르내리고 나니 집이 깨끗해졌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샤워를 했는데 다시 해야 할 판이다. 결국 가스비가 아깝다는 생각을 하며 다시 샤워를 했다. 가장 저렴해서 고른 바디워시도,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샴푸도 모두 향이 좋았다.
날이 따듯해진 줄도 모르고 껴입었던 패딩을 손에 들고 하염없이 걷는다. 주말 내내 비가 오더니 미세먼지 한 점 없는 하늘이 화창했다. 내가 없는 동안에도 계절은 부지런했구나. 꽃잎이 어디서 떨어지는가 싶어 올려다본 하늘 끝에 집 옥상이 살짝 끼어든다. 몇 년 전 올라갔던 옥상을 올려다보며, 만약 그때의 내게 약간의 용기가 더 있었다면 오늘의 계절은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다.
삶은 오직 버티는 것만이 정답일까? 우습다. 불과 며칠 전에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고 그때 그냥 용기를 더 낼 걸, 그렇게 후회했었지 않았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이라면 정답이라고 부르기에 애매하다. 삶은 확신을 구걸하지만 그 누구도 놈의 배를 채워준 적이 없었으리라.
산책을 하는 동안 바람은 살랑거리고, 지나가는 강아지들의 산책하는 모습이 시선을 끌었다. 꽃이 핀 거리는 처음 가본 장소처럼 새롭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 그저 예쁘기만 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눈처럼 흩날리는 꽃잎 아래에 서서 손바닥을 쫙 펼쳐보았다. 매번 미끄러지듯 손바닥을 피하는 꽃잎이 야속해서 한 참 거리에 서서 방황을 한다.
그러다 마침내 점퍼 주머니에 달라붙어있던 꽃잎 한 장을 발견하고 마는 것이다. 희고 뽀얀 꽃잎은 당장이라도 날아가버릴 듯 흔들렸다. 지나치게 가볍고 향도 없는 꽃잎 한 장. 바닥에 쌓여있는 것들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그것이 왜 이리 소중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아직도 이유를 알 수 없다. 어린 고양이를 쓰다듬듯 손가락으로 살짝 쓸어본 다음, 바람이 부는 방향에 맞춰 훅 날려 보내었다. 나의 어떤 것이었던 꽃잎은 여전히 흩날리는 풍경 틈에 섞여 사라졌다.
나의 어떤 순간과 함께였던 것들. 지나친 숫자의 술병들과, 면도칼과 드라이버, 옥상을 오르게 했던 무수한 통화목록들. 꽃잎처럼 아름다운 것들은 이렇게 빨리 놓쳐버리는데, 이들은 왜 아직도 선명하기만 할까. 왜 나는 고통에 이리도 취약할까.
버릇처럼 원인을 찾아 지난 일을 되짚는 나를 저지했다. 내 손목을 잡아챌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것을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원인은 뭐, 아무렴 어떤가. 지나치는 계절에게 미뤄두자. 쉬이 잡히지 않던 꽃잎이나, 땀이 식었는데도 휭휭 불어대는 바람이나. 잘못은 그런 것에 있다고 생각하자. 오늘만큼은 나를 다독여주어도 될 것 같다. 유난히 맑은 하늘을 보니 정말 그래도 될 것 같다. 가끔은 이런 날도 있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