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6
비가 올듯하더니 새벽부터 와르르 쏟아진다. 날씨를 확인하니 일요일은 비가 갤 거라고 하던데, 그러면 오늘은 좀 집에서 게으름을 피워도 되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한참 침대 위를 뒹굴었다. 그런데도 무거운 몸을 끌고 도서관에 간 건, 건너편 카페의 딸기 라떼가 문득 먹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달달한 딸기청을 뽀얀 우유로 덮은 딸기라떼는 샷 하나 들어가지 않으면서 왜 라떼로 불리는지 모르겠으나… 여하간 어떤 계절이 되면 꼭 마셔야 하는 음료인 것은 사실이다. 머릿속에 온통 딸기라떼 밖에 없어서 무슨 정신으로 책들을 골랐는지 모르겠다. 아차차. 반납해야 할 책도 반납하지 않고 왔네.
인간관계는 정말이지 너무 어렵다. 어려워서 싫다. 직장이 재택근무제를 실시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 기회가 거의 없어졌다. 오래된 친구들이 몇 있지만 생활환경이 달라지면서 잘 만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인간관계 때문에 고민할 일이 거의 없어졌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인간관계 코너에서 <이제껏 너를 친구라고 생각했는데>를 꺼내든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 3년간 홀로서기를 훌륭히 해내는 중이긴 하지만 나 역시 상처받고 울던 사연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나만 ‘속아서’ 친구라고 생각했던 대상이 있는가? 알고 보니 그는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만 여기고 있었다던가, 아니면 호구로 이용해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다던가 말이다. 이 책은 친구가 친구가 아니었음을 깨달은 사람들을 다독이는 관계 심리학 책이다.
전반적으로 읽기 편했다. 어려운 용어는 거의 없었고 중간중간 삽입된 일러스트도 담백하고 예쁘다.
책을 꿰뚫는 메시지는 명료했다. 자신이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생각되는 ‘불편한 관계’라도 쌍방의 여지가 있으므로 정도의 문제로 접근하여 해결해 보자는 것이다.
“나는 늘 당해왔어. 나는 피해자야.”라는 피해 의식에 갇혀 있으면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공정한 관계에 영원히 다가갈 수 없다. (…) 그럼에도 가능성을 열어야 한다. 내가 늘 피해자가 안리 수 있다는 점, 나 또한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왔고 그를 이용해 왔을지도 모른다는 점, 그 일말의 여지를 열어놓고 관계의 그래프를 다시 그려보길 바란다.
첫 장은 ‘이용해 먹는 관계’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여기에서 '이용한다'는 표현이 다소 직설적으로 들릴 수는 있겠으나, 관계에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를 이용하고 있다. 이용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비중을 두지 말자. 중요한 것은 그다음이다. 건강한 관계는 이 이용을 호의로서 주고받는 관계인 것이다!
예컨대 나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면 심리적인 안정감을 얻는다. 이를 조금 지독하게 말하면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 좋아하는 친구들을 이용한 것이다. 하지만 그 친구들도 나를 만나 심리적인 안정감, 또는 즐거움을 얻는 다면 이는 호의를 주고받은 것이다.
그러나 이 상호 작용이 어느 한쪽의 이기심이나 욕심으로 인해 불균형을 이루면 관계에 문제가 생긴다. 보통 이기적인 사람이 물꼬를 트기는 한다. 매일 약속에 늦고도 미안해하지 않는 다던가, 늘 자신만 주인공이어야 직성이 풀린다던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바란다던가…. 이것은 지나치게 일방적이어서 당하는 사람을 피해자로 만든다.
물론 이 이기적인 사람들이 마음을 고쳐먹는다면 좋겠지만… 불행히도 이런 책을 사서 읽는 쪽은 늘 피해자 쪽이다. 그래서 책은 피해자를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조언을 기꺼이 건네준다.
그런데, 우리는 왜 항상 피해자가 되는 걸까?
심리학 용어에 ‘초자아’라는 것이 있다. 초자아가 강한 사람들은 “내가 조금 손해 보는 것은 괜찮지만 상대방에게 피해를 주는 건 싫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헉. 내 얘기잖아.) 그래서 상대방이 이기적인 태도를 보여도 대부분 그냥 참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손해를 보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불공정한 관계를 이어가다가 결국 참을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관계를 끝내게 된다. 그 끝은 항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의 손해를 입고 난 뒤이다.
언젠가 인터넷에서 서운한 걸 ‘즉시 터뜨리는 사람’과 ‘쌓아두다가 터뜨리는 사람’ 사이의 간극은 도무지 메울 수 없다는 주장을 본 적이 있다. 실제로 댓글에서도 사람들은 날 선 말투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에 흥미로운 주장이 등장한다.
바로 ‘손해를 선호하는 유형’은 항상 ‘손해 보기 싫어하는 유형’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초반에는 그 둘의 합이 좋을 수밖에 없다. 손해 보기 싫은 사람은 자신과 같이 손해 보기 싫어하는 사람과는 불편한 상황이 많이 생길 것이다. 대신 자신을 배려해 주는 손해를 선호하는 사람과 함께 지내는 것이 편하고 즐거울 것이다. 반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인터넷에서 주장하는, 서운한 걸 즉시 말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토로를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쌓아두는 사람’이 편할 것이다. 우린 정말 잘 맞아, 뭐 그런 생각도 할 것이다. 경우에 따라 실제로도 그럴 테고. 그러나 일방적인 분풀이가 계속되는 관계가 정말 오랫동안 건강하게 유지될까?
그렇다고 해서 손해를 감수하는 우리 초자아인들이 마냥 잘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바로 자아가 너무 연약해서 초자아에게 휘둘린다는 점이다. 우리는 감정적 착취를 인지하고 그에 대해 ‘No’라고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책에서 여러 가지 방법을 제안하고 있지만, 내가 선택한 몇 가지 방법은 이것들이다.
인간관계의 비율 생각해 보기.
관계가 ‘나-너’ 관계인지, ‘나-그것’ 관계인지 생각해 볼 것. 나는 교감과 상호성을 기대하지만 상대방은 자기 필요를 원한다면? 그 비율을 점검해 보고 관계를 이어갈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나는 진정한 관계라 믿고 열과 성을 다했는데 상대는 필요에 의해 맺은 관계였다? 분노는 차치하고라도 애초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나 자신을 비난하기 십상이다. 그러니 약간의 ‘싸함’을 느꼈다면 반드시 그 비율을 따져보고 점검해 보자.
불편한 관계는 서서히 정리하기.
불편한 관계를 깨닫고 나면 즉시 메신저에서 차단하고 연락을 받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는 상대방에게도 나에게도 좋은 결정이 아니다. 만나는 횟수를 줄이거나, 만나는 시간을 줄이는 것이 먼저이다. 예를 들면 주말에 만나 하루 종일 불평불만을 들어주어야 하는 상대라면, 주말 대신 평일 저녁에 한두 시간만 만나는 약속을 잡는 것으로 시작하면 된다. 책에 따르면 ‘주말이라는 소중한 시간은 내주지 않고 평일 저녁에 잠깐만 봐도 되는 사람으로 그 사람을 강등시키는 전략’이다.
감정일기 쓰기
지나치게 모범적인 초자아 때문에 부정적인 감정을 애써 외면하려는 경향이 있다. 감정일기를 써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판단하는 시간을 가진다.
솔직히 말하자. 우리는 순수한 관계에 대한 강박에 시달린다. 필요에 의해 누군가를 만나는 건 나쁘다고, 사람들 이용하는 건 파렴치한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렇게 교육받아왔고 그렇게 강요받아왔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누군가 나를 이용하듯 나 또한 누군가를 이용하고 있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친구 간에, 심지어 가족 사이에도 이용과 이용의 양자 관계가 존재한다. 양자 간의 균형이 깨졌을 때가 문제인 것이지, 그 자체가 당장 지옥불에 떨어뜨려야 할 악인 것은 아니다.
하나하나 꼼꼼히 읽어보니 나는 인간을 싫어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서워하는 쪽에 가깝지 않았나, 하고 반성하게 되었다. 관계에 있어 늘 내가 피해자였다는 일종의 피해의식을 달고 다녔던 셈이다. 관계의 문제는 언제나 ‘균형’에 있었다는 것을 새롭게 깨달은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