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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의 그늘 May 23. 2023

매주 도서관 가는 일기: 네 눈동자 안의 지옥

23.04.09



어제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친구를 만나 먹고 마셨다. 술을 많이 마시진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이 되니 해장이 시급했다. 도서관에 가는 길을 일부러 빙 돌아서 갔다. 대부분의 식당들이 11시 오픈을 알리는 스티커를 유리문에 붙인 채 꽉 닫혀있었다. 그러다가 약간은 촌스러운 나무 간판의 식당을 발견했다. 콩나물 국밥을 파는 곳이었는데 문을 닫았으려나 싶어 조심스레 유리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세상에 열 개가 넘는 테이블이 사람으로 가득 차있었다.


간을 더하고 말 것도 할 것 없이 완벽했던 콩나물 국밥을 게눈 감추듯 먹고 나니 허기가 진정되었다. 심지어 조금 더운 느낌도 들었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너무 새빨갛게 달아오르진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열기를 닦아주는 기분이 들었고, 이것이 오늘의 행복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 오늘은 사랑에 관한 책을 읽어야지.







사랑에 관한 책을 찾는 것은 쉽다. 엄청 많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소설을 읽으려고 했는데 마음에 드는 제목을 찾지 못했다. 참새 방앗간 찾듯 에세이 수필 코너에 쪼그리고 앉아 사랑에 관한 제목을 찾는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과 <사랑은 왜 밖에 서 있을까>를 거의 연달아 골라 들었다. 에세이를 살짝 펼쳐보고 저자가 시인이다 싶으면 무조건 그걸 고른다. 시인의 에세이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르니까.


두 권을 골라 팔에 끼운 다음 영미권 수필 코너로 이동했다. 번역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해외 에세이에도 이제 막 재미를 붙인 참이다. 사랑을 열렬히 찬미하는 제목이 다수였는데, 어쩐지 오른쪽 끝에서 반짝이는 새빨간 표지에 눈이 갔다. (사랑에 관한 책을 읽겠다, 는 나의 다짐은 뭐였을까?) 그것은 우리가 흔히 모성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책이었다. 피로 물든 듯 새빨간 표지 안에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단순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표지를 뒤덮은 빨간색이 그 둘을 삼킬 듯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잠겨버릴 것만 같았다. 단 한 문장이 지나치게 강렬했다.





“아들의 백일잔치를 며칠 앞둔 어느 날, 내 아이의 눈에서 악마를 보았다.”



<네 눈동자 안의 지옥>은 산후정신증을 경험한 어느 엄마의 투병 기록이다. 누가 이런 글을 책으로 써서 냈을까 호기심이 생겨 저자 소개가 있을 표지를 넘겨보았다. 한국계 미국인, 캐서린 조. 짧은 소개글과 함께 실린 저자의 사진을 보고 나니 오늘 이것을 읽을 운명이었나 보다, 싶은 기분이 들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그냥 그런 기분이었다.



저자 캐서린이 한국계 미국인이고 그의 남편 역시 한국계 미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식 산후조리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은 영/미 에세이 코너에 있을 게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 한국 사회가 이 책을 읽고 많은 반성을 해야 한다는 생각도 함께.


시댁을 어려워해야 하고, 남편과 아들에게 져주어야 하는 가부장적 규율은 물론이고 출산 후이엔 미역국을 먹어야 하고 100일간은 손님을 만나서는  되는 등의 한국식 금기 묘사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 외에 하지 말아야 할 것들과 해야 할 것들이 지나치게 많다. 모든 것이 말로 전달된다. 왜 아기띠를 사용하는 거니? 왜 이렇게 자주 우는 걸까? 스트레스를 받았니? 왜 아기를 다른 사람들이 안고 있니? 그러나 큰일이 나면 어쩌려고. 산모나 아기 둘 중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를 그 말들, 그 경고들….


언젠가 읽은 책에서 ‘자아 잃는 경험을 하게 되는 사람이 자살을 결심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라는 존재를 ‘엄마라는 단어가 순식간에 덮어버리는 경험을 하기 때문에 아이를 낳은 여성들은 이미 위태롭다. 그런데도 사회가 산모들을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는 것이 실망스러웠다.  세상이 엄마는 위대하다! 따위의 말로 대충 때우려는 느낌이 든다.


어쨌든 캐서린 개인이 겪은 수많은 일들이 공조하여 결국 그녀는 아이의 100 파티 준비를 앞둔 어느  정신증을 앓는다.


아이의 눈이 악령의 그것처럼 빨갛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사회에 악령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눈꺼풀이 없는 노파, 흘러내리는 매부리코. 그날 이후 캐서린은 잠을   없게 되었다.




‘산후우울증’과 ‘산후정신증’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처음엔 ‘산후정신증’이 좀 더 포괄적인 단어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는데 틀렸다. 산후정신증은 환청과 망상을 동반하기 때문에 분명히 산후우울증과는 다른 병증이었던 것이다.



책은 그녀가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음을 깨닫는 순간으로 시작한다. 아이의 눈에서 악마를 본 사람 치고는 차분하다. 병원에서의 생활 역시 고요했다. 얼마 전에 읽은 <슬픔은 병인지도 몰라>에서 본 정신병원의 양상과는 비슷한 듯 달랐다. 미국의 병원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환자의 병증이 달라서?


정신병동의 생활과 캐서린의 삶 전반에 대한 묘사가 이어진다. 잔혹하게 분노하던 아버지, 폭력을 휘두르던 전 남자친구. 우리는 개개인에게 일어난 비극을 극복한다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그런 건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상처는 지층처럼 쌓인다.




그리고 후반에는 소설이 아닐까 느껴질 정도로 생생하게 그의 망상증이 묘사되는데 당사자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는 것을 알기에 경이롭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충격적이게 느껴지는 그 모든 증상이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니 믿을 수 없었다.






< 눈동자 안의 지옥> 전체적으로 산후정신증을 앓은  사람의 기록이지만 내부를 꿰뚫는 단어는 사랑과 희생이다.


심청이가 인당수에 몸을 던진 이유가 아버지에 대한 커다란 사랑 때문이듯,  사랑은  희생을 기반으로 한다는 한국 설화로 시작한다. 이러한 강박은 그녀의 인생에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었으나 치열한 싸움 끝에  의미를 재배치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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