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기억 | 응답하라 1988
"그렇구나, 잘 가." 그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의 하늘은 잔뜩 흐려 있었고, 거리에는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내 마음도 그날의 날씨만큼이나 어수선했다. 나는 그가 왜 나에게 그렇게 갑작스러운 고백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우리는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그 고백이 나에게는 너무 빠르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엔 준비가 되지 않았다. 어쩌면 내 속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주어진 그 순간이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의 마음이 부담스러웠던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고, 이후 버스를 타고서야 "아직 잘 모르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버스 탔어?" 그가 다급하게 보낸 문자에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는 체념한 듯 "잘 가"라는 짧은 답을 보내왔다.
지금도 가끔 그 순간을 떠올린다. 평소에는 걷던 거리였는데, 왜 하필 그날은 버스를 탔을까? 그 순간의 작은 선택이 우리의 관계를 그렇게 끝나게 한 걸까? 걸어갔다면, 그는 내게 달려왔을까. 혹은 내가 버스에서 내려 그에게 달려갔다면, 우리는 마지막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을까. 그런 상상이 머릿속을 스쳐 갈 때마다 한편으로는 후회가 밀려온다. 그때 나는 왜 망설였을까. 나를 두렵게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갑작스럽게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기엔 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우리 만날까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새로운 인연이 찾아왔다.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온 남자와의 대화는 내게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안겨줬다. 시작이라는 단어에는 언제나 기대와 불안감을 함께 가져오는 법이니까. 지난 사랑에서의 망설임과 후회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이번엔 달라. 나는 두려움 속에서도 용기를 내 그의 손을 잡았다.
tvN <응답하라 1988>은 과거 내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정환(류준열)의 망설임은 나의 첫사랑과 닮아 있었다. 그도 나처럼 너무 많은 것을 고민하며, 결정적인 순간을 놓치고 있었다. 반면, 택(박보검)은 달랐다. 그는 자기 마음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나는 택의 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타이밍이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용기로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내가 더 이상 첫사랑의 아픔에 갇혀 있지 않고, 나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주저하지 않고 행동했기 때문이었다.
내 첫사랑은 늘 거지 같은 타이밍에 발목 잡혔다. 그 빌어먹을 타이밍에. 그러나 운명은... 타이밍은 그저 찾아오는 우연이 아니다. 간절함을 향한 선택들이 만들어낸 순간들이다.
다시 나의 이야기를 돌아보면, 그 시절의 망설임은 한동안 나를 아프게 했지만 이제는 오히려 고맙다. 첫사랑의 아픔이 있었기에 그다음부턴 타이밍을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할 수 있었으니까. 이전의 나였다면 주저했을 순간, 이제는 스스로의 마음을 믿고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그때의 실패가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 셈이다.
이제는 안다. 삶에서 타이밍이란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후회와 망설임을 넘어서, 내가 내린 선택들이 결국 나를 더 단단하게 성장시켜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완성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