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트리를 떠올리는 모과나무
얼마 전 방문한 카페 뜰에 커다란 모과나무가 있었다. 깊고 파란 가을 하늘을 배경으로 묵직해 보이는 모과열매가 높은 나뭇가지에 꿋꿋하게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스페인 시골마을에서 보았던 레몬트리가 생각났다. 생전 처음 본 시골집 돌담너머 레몬트리는 맑고 건조한 파란 하늘을 향해 화사하게 밝고 노란 열매를 뽐내고 있었다. 잎이 다 떨어진 높은 나뭇가지에 열매만 덩그러니 달려 있어 레몬색 열매가 더 눈에 띄었다.
요즘은 마트에서 상시 볼 수 있는 흔한 과일이지만, 진열된 과일이 아니라 레몬이 달려 있는 살아있는 '레몬트리'는 색다른 감흥을 주었다. 기분 좋아지는 밝은 노란색과 우들우들 한 질감, 특유의 타원 모양새를 가진 레몬이 달린 '레몬트리'는 이국의 설레임을 더 해 주기에 충분했다.
너무 높아 못 따는 건지, 감나무 까치밥처럼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건지, 단지 관상용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높은 가지에 타원형 열매가 하늘 높이 달려 있는 모습! 잎이 다 떨어질 때까지 따지 않은 카페 앞 모과나무에 레몬트리의 잔상이 씌워졌다. 십여 년이 지나 비슷한 모습의 모과나무를 보자마자 '파란 하늘 레몬트리!' 그 한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르고 나의 기분도 어느새 스페인 시골마을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되어 여유롭고 밝아졌다.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도 모과를 보고 내가 본 레몬트리와 같은 감흥을 느낄까? 우리도 레몬보다 모과를 접할 일이 더 드문데 모과에 대해 외국인들은 더 모를 것이다. 하지만 타지 여행의 설렘을 더 배가시켜 주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낯선 식물군인 걸 감안하면 모과나무도 누군가에게는 좋은 여행의 추억으로 자리 잡고 있으리라 생각해 본다.
종종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물건이나 식물이 있다. 이제는 가을 모과나무를 볼 때마다 멀고 먼 스페인의 레몬트리가 생각나고 낯선 곳을 여행하며 느꼈던 이국의 설레임을 자동으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남편과의 연애 초기 갑자기 내린 비에 급하게 선물 받았던 접이식 우산으로 떠올리는 풋풋함, 친정엄마가 딸 시집가면 주겠다고 몇십 년을 묵혀 두었던 오래된 그릇에 담긴 따스한 마음, 아이들은 이미 잊었겠지만 '엄마 사랑해!'가 삐뚤빼뚤 적혀 있는 어버이날 카드로 느껴지는 순수한 사랑!
보기만 해도 나의 기운을 북돋아 줄 수 있는 좋은 기억을 연상시키는 추억트리거를 일상 곳곳에 만들어 두는 일이 숨겨둔 힘이 된다. 추억트리거들은 한 번씩 찾아오는 우울함과 무기력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든든한 방패가 되어 준다. 오늘은 추억트리거를 하나씩 목록으로 정리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