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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ther Oct 26. 2024

늘 그 자리에 있어주는 당신

우리 집은 구불구불한 구도심 주택가에 자리 잡은 1층 단독주택이었다. 땅속 개미집처럼 가지를 뻗은 세네 개의 골목은 굽어진 길을 따라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냈다. 우리 집 골목은 골목길을 중심으로 다섯 채의 집이 다닥다닥 벽을 맞대고 붙어 있는 구조였다. 우리 집은 그 골목길 첫 집이다. 친정엄마는 수십 년을 그 집에 사시면서 골목집들의 집주인뿐만 아니라 세 들어 사는 다양한 사람들의 군상을 마주하며 사셨다. 간간히 명절이나 되어서야 집에 들르는 나에게 엄마는 동네 사람들 이야기를 곧잘 하시곤 한다. 전화로는 하지 않는 얘기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골목 사람들이란 주제가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다.


친정엄마에게 그 골목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만남의 장이다. 하지만 대학 이후로 집을 떠나 독립 한 나에게 그 골목은 유년시절의 추억이다. 나는 그 골목을 항상 분꽃으로 기억한다. 요즘은 분꽃을 보기 어렵지만 단독주택이 아파트보다 훨씬 많았던 시절, 분꽃은 생활공간이 아닌 빈 공터를 늘 채우고 있던 존재였다. 우리 집과 골목을 마주하고 있는 앞집 담벼락에는 작은 화단이 있었다. 담을 따라 큰 돌을 두르고 흙을 채워 만든 화단이었다. 앞집 아주머니는 기꺼이 내가 그 화단을 같이 쓸 수 있도록 해주셨기에 나는 학교에서 받아 온 공작초, 백일홍, 코스모스 같은 꽃씨들을 심곤 했다. 


어느 해부터 매년 앞집 대문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는 분꽃이 자라고 있었다. 튼튼하고 굵은 줄기가 올라와 나무 마냥 가지를 뻗어내고, 풍성한 연초록 잎들 사이로 나팔 모양 분홍꽃을 한가득 피워내는 분꽃의 생명력은 여느 풀꽃들과는 달라 보였다. 앞집 아주머니도 분꽃을 좋아하시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른 꽃들은 잡초로 생각하고 뽑아내실 때도 있었는데 분꽃은 항상 살아남았다. 그 덕에 분꽃은 우리 골목길 터줏대감처럼 매년 항상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린 날 단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인 분꽃을 나는 아직도 좋아한다. 장미나 튤립 같이 화려하게 크지도 않고 국화나 백합 같은 진한 향도 없지만 분꽃은 애정을 불러일으킨다.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분꽃의 꽃잎처럼 보이는 부분이 사실은 꽃받침이라고 한다. 꽃잎이 없는 '안갖춘꽃'이다. 꽃잎, 꽃받침, 암술, 수술을 다 갖춘꽃이든 안갖춘꽃이든 사람들이 꽃을 알아보고 마음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고 감사한 일이지 않은가!


어쩌면 사람도 그렇다. 단지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나의 애정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인간관계에서 서로에게 같은 자리를 지켜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이가 들수록 알게 된다. 같은 자리에서 변함없이 응원해 주는 가족, 언제나 편하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해 주는 직장 동료.. 다들 그 자리에 있어줌으로 오늘 하루가 참으로 감사하다.


그들이 반찬 투정으로 나의 힘을 빼놓더라도, 자기 이야기에 푹 빠져 한 번씩 나의 정신을 빼놓더라도, 일을 하다 의견이 달라 다투더라도 그들은 내가 알아본 안갖춘꽃들이다. 나의 인생을 꽃길로 만들어주는 이들이고 나를 꽃으로 알아봐 주고 마음을 내어 준 사람들이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안갖춘' 면을 이미 알고 있을지 모른다.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서로의 안갖춘 면을 말없이 보듬고 있는 우리 사이가 얼마나 귀한 인연인지 생각해 볼수록 가슴이 벅차오른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에 매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하루하루가 긍정으로 채워지고 일상을 바꿀 수 있다. 내가 숨 쉴 수 있는 공기, 수도꼭지를 틀면 나오는 깨끗한 물, 아침마다 떠오르는 태양,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행복이다. 돌아보면 나 홀로 지금의 나를 만들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어주어 고마운 존재들 특히 나의 일상을 돌볼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영감을 주는 식물이란 위대한 생명체에 오늘도 무한한 사랑과 감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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