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하는 말은 들리는 법
상담에서 배우는 것이 있다면 질문에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 질문은 내가 궁금한 것을 알기 위한 질문도 있겠지만 자신을 인식하게 하는 위한 질문이다. 상담을 배우기 시작할 때 임상대상? 은 아이들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상담에 오염됐다고 표현하는 대상이 된다. 그 말은 상담에 대해 오해하고, 상담을 너무 싫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내가 질문하는 것에 아주 짜증을 낸다. 엄마는 자녀에게 상담사가 될 수 없다.
처음 상담실을 방문하는 아이들도 질문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도 필요할 때는 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남이 하는 말은 잘 듣는 것 같아도 마음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이 한 말은 마음에 들린다. 아동이나 청소년이나 성인에게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이 질문이 아주 쉬울 것 같지만 훈련이 필요하다. 훈련은 여기서 치유된 사람을 말한다. 치유된 사람의 질문에는 힘이 있다. 그래서 상담사는 계속 치유되어야 한다. 상담사는 무의식적으로 치유되고 싶은 것이 많아 상담사가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타인에게 투사만 던지는 상담사는 치유를 일으키기 어렵다고 나는 생각한다. 무의식의 의식화를 돕는 질문이어야 하며 이것은 의식을 확장시킨다. 모든 발달에는 고통이 따른다. 상담사가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돌리고 부단히도 견디면 치유의 힘이 퍼져나간다. 돕고 싶다면 본인이 먼저 치유 과정을 충실히 하도록 권하고 싶다.
서로 갈등이 생길 때 아이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짜증을 부려도 방에서 한참 있다 보면 스스로 깨치고 나올 때가 종종 있다. 이때 내 뜻을 꾹꾹 눌러 기다려야 한다. 난 우리 아이들에게 상담사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엄마는 될 수 있다. 가끔 아이들 때문에 힘들었다고 교수님께 하소연을 하면 '언제 클 거야?'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 질문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난 아이들이 부러운가 봐. 나도 돌봄 받고 싶었어. 그렇구나. 그래 그럴 수 있지' 내게 대답을 돌려주면 다시 아이들과 똑같아지려고 하던 마음을 멈춘다. '그래, 나 엄마야' 자신이 자신에게 하는 말은 들리게 되어 있다. 이름만 엄마가 아니라 엄마가 되자. 그런데…사춘기 엄마는 참 힘들어 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