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정도 나 때문이었다.
어느 날 지역의 청년 한 명이 정치에 입문하려 한다며 의견을 묻는 일이 있었다. 타인의 인생에 조언을 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실은 거의 무용한 일이기도 하기에 잠시 망설였다가 하려면 스카우트가 아니라 활동가로서 바닥부터 다진다는 긴 호흡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길 건넸었다.
최근 들어, 아니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지속적으로 고민하게 만드는 주제가 있다. 지역에 살지만 다소 어정쩡하게 마음 둘 곳 없이 뜨내기처럼 지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에서 공허함을 자주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지역에는 청년들이 별로 없다. 모두가 이제는 너무도 잘 알다시피.
지역에 정착한다는 것.
지역에서 살기로 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자면 마음이 뿌리를 내렸다는 말이다. 그것이 어디에 가 닿았든 마음이 자리 잡을 곳을 찾아 깊게 안착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내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세밀하게 살피지 못한 채로 시간이 흘러갔다. 나고 자란 땅에서 느껴지는 두 가지 메시지가 지속적으로 번뇌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했다. 같은 고민으로 취재했던 지역의 청년들에게도 같은 고민이 느껴졌다. 자신이 자라고 살아온 땅에 대한 자부심과 기회의 절대적인 부족 때문에 이주를 고려하는 방황의 마음이 동시에 요동치고 있음을 감지하고는 했다.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 대한 애정과 자긍심을 느끼는 것은 인간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서울이라는 공간은 순리대로 흐르는 마음을 틀어버리는 강력한 자기장이 존재한다.
때때로 어느 사람들로부터 지방대학생들이나 지역 출신 인재들이 드러내는 한계, 이를테면 지적인 호기심이나 열정과 심지어 욕심과 명예욕에의 결핍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실재할 수밖에 없는 격차, 그러니까 건물, 교통, 자본과 인물이라는 계량화되는 부족함 외에도 도전정신, 의욕, 꿈의 스케일과 상상력과 같은 비계량적 격차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는 순간들이 많아졌다. 어느 한편으로는 합리적인 지적임과 동시에 어느 한편으로는 완전히 호도된 잘못된 인식이기도 한.
지역 학생들이 방송국을 견학 오겠다고 하거나 취업이나 진로 관련해서 상담을 받고 싶다는 연락을 받게 되면 어지간한 일정이 아니고서야 성심껏 자리를 만들었다. 그들과 이야기하면서 느껴지는 상대적인 정보의 부족,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초래되는, 더 촘촘하게 설계될 수 있던 계획에 대한 아쉬움, 절대적인 멘토의 부족과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기회의 부족함에 대해 절실히 느끼곤 했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사람의 자질 문제가 아니라 상황으로 인한 꿈의 한계와 욕망의 크기가 제한되곤 한다는 당연한 인과였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지역을 떠나기로 한다. 절대적인 인프라의 부족과 무엇보다 가장 큰 요인인 일자리 부족으로 인해서. 그러나 그 이면에는 이렇게 계량화하기 어려운 요인들이 결정을 제한하고 결과적으로 지역을 어떤 부족한 것, 모자라는 것, 그래서 떠나야 하는 공간으로 만드는 악순환 속에 놓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상황이 나아지겠는 가.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고 지역을 스스로 재설계할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걸까?
이런저런 곳을 기웃거리기도 하고 지역에서 오래 활동해 온 사람들의 삶과 글을 읽으면서 어렴풋이 한 가지 키워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그 이후로 지속적으로 때로는 강박적으로 그 키워드를 생각하게 됐다.
헌신.
모든 것이 서울에 집중되어 있고 자본의 논리로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겠다는 비관적인 낙천주의가 깃든 단어.
실제로 그나마 한 줌 남은 지역에서 힘을 잃지 않고 작게나마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아니 실은 더 나빠지지 않도록 마지막 둑을 막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태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바위에 계란을 치듯이 일견 부질없어 보이는 일들을 마지막까지 손아귀에 부여잡고 지속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놀랍게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소 수동적으로 붕괴를 막는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들, 그러니까 실제로 이 나라에서 거의 멸망해가고 있는 다양성이랄지 지역성이랄지 전통이랄지 하는 것들을 진심으로 믿으면서. 그들이 그 일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지는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들의 삶에서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덕목인 헌신에 대해서 자주 생각할 뿐이다.
세상은 왜 계속해서 나빠지는 것 같을 까?
이 생각을 할 때마다 언제나 다시 헌신이라는 단어로 돌아오게 된다. 공동체의 붕괴라는 6글자에 담긴 무게는 실로 그리 간단치 않다. 서울과 자본이 그리고 중앙 집중화된 권력이 모든 것을 다 빨아들인다 할지라도 공동체는 약탈된 물질적 기반 위에 존재하는 어떤 정신과도 같은 개념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빼앗아간다 하더라도 공동체가 살아있는 곳은 부정적인 것들로 모멸당하는 가치들의 근원을 되살려낸다. 이를 테면 가난이나 저개발 같은 것들을 다양성과 가능성이라는 긍정의 것들로 바꿔낼 수 있는 힘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을이 작을수록 여론은 정교하게 형성된다. 대화의 채널이 작을수록 설득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방대한 이야기에 현혹되는 대신 자신의 곁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을 자신들의 힘으로 결정하고 실행할 자주가 생긴다. 공동체가 살아있다면 가능한 옵션이다.
그렇다면 공동체는 어떻게 유지되는 가. 파편화된 주거 방식, 세분화된 노동의 형태, 단절된 라이프 스타일을 넘어서 공통의 접점이 생길 때에야 가능하다. 세상은 왜 이렇게 갈수록 나빠지는 걸까 이런저런 뉴스를 살펴보다가 늦게 일어나던 토요일 오전, 아파트방송을 통해 무슨 문화 장터 같은 것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 순간 계속해서 같은 방송이 반복되자 짜증이 나길 시작했다. 주말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그렇게 스스로가 복원해야 한다던 공동체의 모습이 저것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사람이 사는 데는 많은 모임이 있다. 직장 모임이 있고 스포츠 동호회가 있으며 가장 끈끈하게 유지되는 것은 역시 종교 모임이다. 공동체란 이런 모임들을 작은 모세포로 한다. 모임이 없으면 공동체도 없다. 그런 모임이 원자 단위에서 파괴되고 있다. 서로의 얼굴을 대면하고 대화를 나누는 오프라인의 활동이 갈수록 줄어든다. 거주의 형태도 격차가 발생하기 시작해서 고만 고만한 사람들이 한데 어울렁 더울렁 모여 살았던 아파트 단지가 이제는 고급화되어 서로 사는 곳을 들어가 볼 수도 없는, 출입을 통제하고 마주침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방식으로 디자인된 주상복합과 서민의 아파트로 완벽히 나눠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웃을 마주하고 그 사람이 사는 것을 함께 감각한다는 것은 불쾌하고 피해야 할 것이 되어버렸다.
불쾌한 타자
좁은 주차장이 문제인 아파트에 살면서 나에게 지랄한다고 욕을 해대는 이웃 아저씨를 마주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공포이자 불쾌한 경험이었다. 아마도 넓고 쾌적한 고급 아파트였다면 애초에 발생하지도 않았을 일이었을 거다. 서로의 이권때문에 얼굴을 붉히며 돌아서서 한바탕 분노가 사라지고 나자 만일 내가 그 아저씨를 아는 사이였다면 그러니까 지역의 고질적인 병폐인 지인이었다면, 이를테면 어머니의 지인의 남편이었달지, 삼촌의 아는 친구였달지 했다면 아마도 그 오전의 격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지란 생각이 들었다. 지연이나 학연으로 연결되지 않았더라도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과 정담 어린 한 두 마디 인사와 안부를 건네는 사이였다면 아마도 그는 흔쾌히 차를 빼주며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말을 잊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왜 자꾸 나빠지는 걸까. 그것은 내가 공동체에 참여하기를 꺼려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어떠한 변화나 움직임은 결국 누군가를 직접 대면하지 않고서는 생길 수 없는 일이라고, 잠시의 센세이션이나 버킷 챌린지 같은 유행이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라는 것은 그리고 움직임(movement)이라는 것은 결국 끊임없는 참여와 헌신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에 새겨진 사건이 있다. 두 가지 사건이었는데 하나는 자신이 치료하던 환자의 손에 살해당한 정신의학자의 비보와 나머지 하나는 주변에 노숙자나 힘든 사람들을 지나치지 못하던 약사가 느닷없이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겁이 많은 나로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들. 문을 걸어 잠그고 단절된 채로 안전을 도모해도 모자를 상황에서 자신의 세계를 열어 타인들과 함께 기꺼이 공유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발견하면 할수록 경이로웠다. 평범한 사람들이 내는 기적과 같은 용기가.
스토킹의 피해를 두어 번 당하고 악의로 가득한 사람들의 악행을 보면서 두려움과 공포에 굳게 내 잠근 내 좁은 세상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을까? 대면하지 않고 관념적으로 고민하면서.
타인과 대면할 용기와 공동체
여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지역을 부유하며 살고 있다. 이런 어정쩡함 때문에 전력을 다해 무엇인가를 해내고 있다는 충족감도 만족감도 없다. 내 도시가 아닌 것 같은 기묘한 마음의 저편에는 어떤 공포와 타인을 불신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자기 방어의 기제가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져서 결국은 변화의 가능성 역시 함께 닫혀버린다.
바닥부터 일궈내야 비로소 열매를 맺을 작은 결실들이 어설프게 떠다니는 상념과 고민들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하는 패배감을 반복적으로 겪게 한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린 다는 것은 상상보다 더 큰 애정이 필요한 일이며 헌신은 실상 타인을 깊이 신뢰하고 직접 대면하는 용기가 있을 때에야 가능한 일이다. 그 용기가 갑작스럽게 생길 것 같진 않지만, 그리고 너무도 뻔한 이야기지만 공동체를 복원하는 것은 결국 개인의 참여이며 헌신은 지치지 않고 실망감을 안겨주는 타인을 끊임없이 대면할 수 있는 용기의 반복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고 있다. 아파트 모임은 아무래도 당분간 안 나갈 것 같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