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그리움을 부르고
첫눈이 내린다. 엊그제 첫눈이 왔다고 하지만 나는 못 보았다. 내가 사는 곳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 그러니 내게는 오늘 내리는 눈이 첫눈이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창밖이 안개 낀 듯했다. 점점 더 짙어지더니 급기야 눈이 내린다. 거실 창 앞에 한참 서서 눈 오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눈송이가 몽실몽실 목화솜처럼 날린다. 놀이터 기구들 위에, 운동 기구들 위에, 아파트 정원 보도블록 위에, 저만큼 보이는 산책로 위에.
무연한 마음으로 눈송이를 본다. 우리 집 마당에도 저렇게 눈이 내리던 날이 있었다. 방 안에서 화롯불을 쬐며 묻어둔 고구마가 익기를 바라고 있을 때, 마실 갔던 할머니가 수건으로 눈을 털며 들어오셨다. 눈이 오신다. 내년에는 보리 풍년이 들게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봉당으로 내려섰다. 작은 안마당에 벌써 흰 눈이 소복하게 내리고 있었다. 화로에 묻어둔 고구마에 마음이 팔려 눈이 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은 자고 일어나 보면 온통 눈의 나라가 되어 있었다. 납작 엎드린 지붕 위에, 담장 위에, 장독대 위에, 마당 위에, 소복소복. 방문을 열고 나가면 찬 기운이 훅 끼쳐왔다. 설렜다. 뛰어나가 눈 위에 발자국으로 눈꽃을 만들었다. 여섯 개, 또는 여덟 개. 마당 가운데에, 사립문 앞에, 건넌방 앞에. 마당 쓸기 언짢다, 그만해라. 할머니가 걱정하시면, 뒤란으로 가서 장독대 옆에, 황매화 옆에, 소꿉놀이하던 울타리 옆에, 또 눈꽃을 만들었다.
또 어느 날은 달빛이 하얗게 내리는 밤에 눈이 왔다. 달이 있는데 눈이 내리다니, 신기했다. 눈 오는 기색이 있으면 가만히 방문을 열고 나가 뜰에 서서 그 풍경을 보곤 했다. 눈이 오는 날은 포근했다. 그러다 마당에 내려가 하늘을 향해 가슴을 열기도 했다. 얼굴로 떨어지는 눈송이는 포근했다. 사뿐사뿐 내려앉는 눈송이를 얼굴에 맞고 손으로 받으며, 한동안 서 있곤 했다.
뛰어 나가고 싶다. 눈을 맞고 눈꽃을 만들고 싶다. 나이를 잊고. 펄펄 눈이 옵니다. 하늘에서 눈이 옵니다. 동요를 흥얼댄다. 눈송이가 더 커졌다. 아기 주먹만 하다. 작은 공처럼 보인다. 창문을 열었다. 덧문을 열고 방충망까지 열었다. 손바닥에 눈을 받아 뭉친다. 차지다. 찰 눈이다. 눈사람 만들기 좋은 눈, 눈꽃 만들기 좋은 눈이다. 마음은 벌써 내려다보이는 놀이터로 뛰어간다.
차츰 눈발이 가늘어지고 그만 그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박눈으로 내렸기 때문에 아파트 정원과 정원수를 하얗게 덮었다. 하늘이 차츰 밝아오기 시작한다. 어느새 언뜻 푸른 하늘이 보인다. 언제 그랬냐 싶게 맑은 얼굴을 한 하늘. 커피 한 잔을 연하게 준비해 다시 창가에 섰다. 눈이 벌써 녹기 시작한다. 첫눈의 매력이 짧게 오고 금세 녹는 것인가.
음악을 켠다. 아다모의 샹송 ‘눈이 내리네’다. 호소력 있는 목소리. 간들거리며 감성적인 바이브레이션. 두어 소절 듣는데 눈물이 흐른다. 언제나 그렇다. 그리움 때문인지, 아쉬움 때문인지.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그리움이고 아쉬움인지. 그런 것과 아무 상관없다. 노래가 끝났을 때, 건너편 산자락에 햇빛이 비쳤다.
70년대에는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을 친구들과 곧잘 하곤 했다. 휴대전화는커녕 일반 전화도 흔치 않던 시절이 이야기다. 철석같이 믿고 약속 장소에 갔던 적이 있다. 한 시간을 기다려도 아무도 안 왔던 날,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첫눈을 못 봤을지 몰라. 그곳에는 안 왔을지도 몰라. 잊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왜 모두 나 같다고만 생각했을까. 그런 약속을 누가 그리 지킬 거라고.
언젠가는 추석 때 고향에서 친구들을 만났을 때, 첫눈 오는 날, 서울역 시계탑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드디어 첫눈이 내렸고, 서울 한 귀퉁이에 등 대고 살던 나는 약속 장소로 갔다. 남자 친구 한 명이 와 있었다. ‘수’였다. 그와 남산에 올랐다. 그때 만났던 수는 오늘처럼 첫눈 오는 날, 서울역 시계탑을 떠올릴까. 별로 감성적이지 않고 순박하기만 한 수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 같다. 눈사람이 되다시피 해 나타난 수의 잔뜩 웅크린 어깨와 낡은 점퍼가 선연히 떠오른다.
창 앞에서 한 시간 족히 서 있었던 것 같다. 다리가 아프지 않은데, 눈가는 촉촉했다. 가슴에는 서늘한 그리움 같은 감정이 밀려들었다. 그 감정을 만끽했다. 첫눈 오는 날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니까. 말랑말랑한 이런 감성들이 척박하고 황량한 삶의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된다. 저 첫눈이 녹으면 내가 좋아하는 산책을 나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