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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10. 2024

한련화

  

가끔 가던 찻집이 있었다. 주로 전통차를 파는 곳이다. 공원 근처였는데 오래된 초가 내부를 약간만 고쳐 찻집으로 사용했다. 방석에 앉는 게 약간 불편하긴 했으나 대추차나 모과차 맛이 깊었다. 더구나 찻집 주인에게서 풍기는 이미지가 오래 우려내 깊은 맛이 나는 대추차나 쌍화차 같다고 할까, 고전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까, 그랬다. 나를 기억할 리 만무하건만, 들를 때마다 다정하게 웃으며 동기간이라도 만난 듯 반기는 모습 또한 우리의 정서와 맞닿아 있어 편안했다. 


그런 것도 성향에 맞았지만 내가 그곳에 가끔이라도 들른 건 찻집의 뒤란 때문이었다. 거기서도 한련화. 지금도 한련화를 생각하면 그 찻집이 생각난다. 어느 해 초여름이었던 듯하다. 친구의 이끌림에 들른 찻집에 앉아 내다 본 바깥 풍경은 그 집의 뒤란이었다. 파란 잎사귀 사이에서 올라온 꽃대 끝에 매달려 활짝 핀 노랗고 빨간 한련화가 돌담과 어우러져 피어 있었다. 어릴 적 외가에서 보았던 꽃이다.


갑자기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게 있었다. 그리움이다. 여름방학 시작 후 다음날이면 외가에 가서 방학 끝나기 하루나 이틀 전에 돌아왔다. 외가도 돌담이었고, 그 뒤란에 돌담과 어우러진 한련화가 칸나와 함께 피고 졌다. 어머니는 나를 데려다 놓고 하룻밤 자면 집으로 가셨다. 솔직히 나도 따라가고 싶었지만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방학 내내 외가에서 보냈다. 


이모는 정성을 다해 나를 보살펴주고, 외할머니와 어른들 모두 신경 써주셨으나 어머니가 계신 집이 그리웠다. 외롭고 소외된 감정을 느끼며 지내야 하는 게 힘들었다. 어른들이 잘해주시는 것과 상관없이. 그런 감정들을 견디기 위해 그 더위에도 골방에서 독서에 몰두하곤 했다. 초등학생인 내가 읽을 만한 책은 아니었다. 외숙들과 이모가 보는 세계문학 또는 한국대표 문학 전집이었고 농민 잡지들이었다. 사범학교나 중학교에 다닌 외숙들이 산 책이었을 게다. 한자가 섞이고 세로 쓰기로 된 작은 글자를 읽노라면 눈이 피곤했고, 골방이라 더웠다. 마루에서 읽어도 되는데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아 골방에 틀어박혀 읽었던 듯하다. 


그러다 어머니 생각이 나서 뒤란으로 가면 화들짝 웃고 있는 한련화가 있었다. 그뿐인가. 달리아, 칸나, 채송화, 봉숭아 등 여름 꽃이 장독대 옆에 피어 나를 위로했다. 한참 보고 있노라면 이모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옥수수 먹자고, 감자 먹자고 이끌었다. 가끔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그러면 이모도 같이 눈물이 글썽거렸다. 입이라도 하나 덜려고 어머니가 외가에 나를 놓고 간 걸 잘 알기 때문에 따라가겠다고 나서지도 못한 마음을 이모는 알았으리라. 


저녁나절에 외할아버지는 안마당과 바깥마당에 쑥대궁 따위로 모깃불을 피우고, 나는 매캐한 연기 사이로 별이 돋아나는 걸 보았다. 한가롭고 평온한 산촌의 밤은 금세 후덥지근했던 낮의 열기를 식히며 깊어갔다. 이모가 들려주는 먼 옛날의 신화나 별들의 이야기를 무릎 베고 들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며 집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방학 며칠 전이면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오셨는데, 골방의 책들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다 못한 방학숙제를 밀쳐놓고 더욱 독서에 열중했다. 


무슨 뜻인지 내용인지도 잘 모른 채, 그렇게 그 시절에 세계명작과 한국대표 소설을 거의 섭렵했다. 그렇게 읽었더라도 나중에 문학을 공부하게 되었을 때, 어느 틈에 숨었다가 나오는지 그 내용이 툭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곤 했다. 그래서 하나의 지론이 생겼다. 어쨌든 읽어놓은 책은 저장돼 있다는 것, 적당한 기회가 생기면 보물처럼 반짝거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읽은 책들은 내 삶의 여정에 큰 영향을 끼쳤고, 방향을 결정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며칠 전 그 찻집 근처에서 윤 작가와 식사를 했다. 한동안 찾지 못했던 그 찻집이 생각났다. 그 집에서 차를 마시자고 했더니 윤 작가는 그 찻집이 없어졌단다. “어머나! 그럼 한련화도 없어졌겠네요!” 새된 목소리로 깜짝 놀라 외쳤다. 내 반응에 윤 작가는 약간 놀란 듯 말했다. “더 좋은 카페 많아요. 한련화는 또 뭐예요? 아이, 더 좋은 카페 많다니까요. 거긴 낡고 방석에 앉는 곳이라 불편했잖아요.” 윤 작가가 나를 이끌었다. 


그래, 낡은 것은 다 사라질지 모른다. 아니, 낡은 것이라 생각되는 것들은. 내겐 절대로 낡은 게 아니지만 대중들의 생각은 나와 같지 않을 수 있다. 그게 세류다. 그래도 나는 못내 아쉽다. 그 찻집에 가면 지금쯤 거의 지고 있는 한련화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직도 세류 타는 게 어색하고 불편한 나다. 오십 년 전에 사라진 외가의 뒤란 한련화를 그 찻집에서 만나곤 했는데, 이제 다 사라졌다. 사라지지 않는 게 어디 있으랴마는 눈가가 촉촉해졌다. 


윤 작가가 이끈 카페는 산속에 있었다. 산자락에 둘러싸인 현대식 건물의 대형 카페였다. 요즘 흔히 대세라고 하는 천연발효 빵과 커피를 파는. 풍광은 좋았다. 하지만 외가의 향기가 나던 그 전통찻집의 풍경이 생각나 그리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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