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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Sep 25. 2022

“단잠은 당신이 되어주세요.”


누구나 어려운 감정과 마음으로부터 도망치려는 본능이 있다. 가라앉는 순간을 용인하지 않고, 빛을 갈구하며 위로 떠오르려는 욕망. 마음을 우울로 물들이는 것들을 멀리하고, 유쾌함이 가득한 것들을 가까이에 두면서 어떻게든 행복에 다가서려는 발버둥. 삶의 높낮이를 따라 힘겹게 끌려가는 마음의 발걸음에 지쳐 한동안 불행에 발을 담근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어차피 행복은 잠깐이야.   힘들어질 거고,

무너질 거야. 그럴 거라면 애초에 

행복이라는 고지에 오르지 않겠어.

바닥에 있으면  이상 추락할 곳도 없겠지.’


서문만 읽다 내려놓았던 에리히 프롬의 <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를 오늘 다시 펼쳤다. 전심으로 슬프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는 정서적 능력의 필요를 언급하는 학자의 말에 문득 기억 저편 먼 곳에 있던 안온한 미소와 따스한 손을 가졌던 사람이 떠올랐다. 10여 년 전, 딱 지금 내 나이대의 당신이 줄곧 나에게 했던 말이 있었다.


감정 하나하나 놓치지 말고,
주위 사람들의 생각을 부속물로 
자신을 채워 나가려 하지도 말고,
  내가 아끼는 너를 사랑해 .


좋은 감정도 힘든 감정도 곱씹어, 행복과 불행 모두 살아있음을 느끼라는 그 연륜이 다시금 마음을 겸허하게 만든다. 타인의 감정적 배설에도 연연하지 말고 오로지 내면에 귀 기울이라는 말로, 자신을 사랑할 줄 몰라 파괴의 길을 걷고 있던 무지한 걸음을 가까스로 멈추게 했다. 불행이 아직은 익숙하지 않던 나이에, 피하거나 외면할 수 있는 것이라면 왜 굳이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내 손에, 발에, 눈동자에, 머리카락에, 낮은 코에도 별명을 붙이며 사랑을 건네던 목소리가 하는 말이라면 달랐다.


문득 돌이켜 보면 그때부터였다.  목소리를 계기로 인생을 오롯이  생각들로 채우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순간이 오더라도 내 선택이라는 이유 하나로, 따라오는 아픔조차 굳이 곧대로 받아들여 충분히 울었다. 실컷 비가 내린 뒤 갠 세상을 향해 햇살이 비치듯, 불행과 행복 사이에서 미동도 않고  어떠한 것도 느끼지 않겠다던 헛된 다짐을 지우니 당신이 매일 해처럼 다정하게 떠올랐. 그렇게 환한 봄날의 낮처럼 포근한 안온함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찬란하다 못해 눈이 부셔서 눈을 감을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었으니 언제나 단잠은 당신이 되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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