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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여 Oct 10. 2022

행복 총량을 위해, 기꺼이


“보면 소여 씨는 유독 타인에 대한 사유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타인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자아는 없으니까요.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의 중심이 나일뿐이지,

나의 구성은 대부분 타인으로 이루어져 있어서요.”


“그렇게 생각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나요?

난 아직도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고 있어서 그런가,

의견을 나누고 공감할 때를 제외하고는

스스로에 고립되는 경우가 많아요.”


“저라고 다르진 않아요. 오히려 타인을 생각해

본다는 핑계로 나를 빗대다 오해하기 일쑤죠.”


시간을 거슬러 떠올려 보니, 한때는 이성의 힘을 따라 절제된 사고를 영유하는 스토아주의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감정과 분리된 독립적인 형태로서의 사고가 마음의 혼돈을 질서 있게 통제할 것이라고, 그것이 행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그러다가 문득 어느 때보다 이성의 힘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전파될 수 있는 환경인 지금, 그 반대의 움직임이 폭력적일 정도로 거세게 일어나고 세계가 행복하지 못한 연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스토아주의의 논리대로라면 이성이 존재하는 이상, 모든 인간은 평등한 존재다. 이성이 박애의 기준이 되며, 자연스레 지성의 불균형은 불평등의 지표가 된다. 그렇다면 이성과 지성의 정도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뭘까? 현대사회에서는 누구나 지식과 정보를 쉽게 찾아내고 습득할 수 있다. 넘쳐나는 정보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성의 기준은 개별화된 취사선택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태도로 인해 그 경계가 더욱 모호해졌다. 믿고자 하는 정보만 보도록 편향된 구조를 제공하는 미디어로 인해, 이성의 감정화를 유도하는 전반적인 사회 구조로 인해 탈진실의 시대가 도래한지도 꽤 오래다. 진실의 정의는 사라졌다. 이성을 꿈꾸기엔 잡음이 너무 많다. 자신이 아는 지성만이 진실이라 주장하는 각기 각색의 목소리가 등장하면서 혐오는 자연스레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언젠가부터 모두가 상대에 대한 일말의 오해로

자기주장을 무기 휘두르듯 내세우거나,

내 생각만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진리인 양

세상 옳은 것처럼 자아를 중심으로 외부를 향해

거대한 벽을 세우고 있는 것 같아요.

자기방어만 강해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은

흐려졌어요.”


 스스로를 지성 기반의 사고로 둔갑시킨 감정적인 이성은 자신의 진실을 지키기 위해 쉽게 타인과 경계를 긋는다. 스토아철학은 희망을 꿈꾸는 낭만주의자들과는 달리 감성 앞에서 고립되었다. 모든 스토아주의의 목적이 행복의 증진이라는데 그 행복의 근원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정말 이성에만 있는 것일까? 공공의 선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실 경험이 없는 철학자조차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마사 누스바움은 사랑과 연민의 부재가 문제임을 지적했다. 그녀의 신스토아주의에 대한 지지는 개인의 행복을 얼마나 단호하게, 단단하게 지킬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는 철학적 입장에서 조금 더 나아간다. 내면을 지키기 위해, 고통에도 준비된 자세를 갖추도록 훈련하게 만드는 이 철학적 입장은 정작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타인에겐 매정하다. 자신의 행복 증진이 타인의 행복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이 정의로운 철학가로 거듭나야 세상을 정의롭게 만들 수 있다는 개인의 목표로 회귀한다.


“당신의 옳음과 가치를 인정하면서 나도

그럴 수 있다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자기주장에서 한 걸음만 뒤로 빠져나오면

뭐든 참 쉬워 보일 텐데 왜 이렇게 자아에

도취되어서 타인을 무너뜨리고 싶은 걸까요?”


자신에 대한 우월감으로 남을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익숙해진 걸까? 왜 우리 모두의 행복은 함께할 수 없을까? 나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스토아주의와 오랜 적대 관계에 있던 공리주의는, 행복 총량을 통한 도덕 원리의 개념을 정립한 존 스튜어트 밀의 질적 공리주의로 많이 알려져 있다. 기본적으로 공리주의는 인간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과 선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최대 행복과 선을 희생할 의지가 있는 존재로 그린다. 그러나 공리주의 개념 안에서 절대적 희생은 최대 다수의 행복 총량을 줄이는 결과로 이어지므로 옳지 못한 것이다. 모두가 다 함께 행복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공리주의는 윤리학 제1원리가 이루지 못하는 인간의 감정을 정화하는 역할로, 행동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을 든다. 이것이야말로 도덕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자 우선적으로 다뤄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굉장히 전형적인 말이지만,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먼저 보듬는 사랑의 태도여야지만

개인주의도 개인주의다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나 자신을 지킨다는 본인의 역할도 물론 있겠지만,

사회의 역할이 있어야 하고, 그 사회의 움직임을

도출하려면 역시나 다수가 존재해야 하니까요.

그 과정 중에 자신의 자아가 있어야 하는 거죠.”


“행위나 시선에 자아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세상을 향해가는 방향으로요.”


“그게 가장 이상적인 사회의 모습이죠.”


“…함께 한다는 전형적인 표현보다 서로를

향해 있어야 한다는 표현이 묘하게 서로의 다름도

인정하는 느낌이라서 마음에 들어요.”


최대 다수의 행복이 도덕 원리가 되는 공리주의는 마치 특정한 타인에 대한 애정이 한 명에게 머물 수 없으며, 그 감정은 나를 향한 것이기도 세상을 향한 것이기도 해야 한다는 프롬의 ‘사랑’과도 닮아 있다. 가까운 이에 대한 사랑이 완전한 타인에 대한 사랑보다 적어서는 안 되며, 모든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다는 프로이트의 접근과는 상반된다. 인류애는 특정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 낳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인간 자체를 향한 사랑으로 경험되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며, 또한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행복 또한 추상적인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총합체로, 행복의 일부나 수단이 되는 것이 인간 행동의 유일한 목적이 되도록 만든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삶에서 마주한 모든 선택의 기준이 행복을 위한 방향인 것을 보면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기에 행복의 증진은 모든 인간 행위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며, 그로써 도덕 판단의 기준이 된다는 논지가 공리주의의 핵심이다.


“자기 자신에서 출발해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은

맞지만, 출발점이 자아라고 해서 도착점도

자아일 순 없잖아요, 그럼 도돌이표인데.

그래서 자신의 내면으로 파고드는 냉소적 이성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세상의 행복 증진과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도덕성에 더 가까워 보여요.”


“여전히 수많은 책들이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이야기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조금 더…

좀 더 뭍으로 나오면 좋겠어요. 자신의

부딪히고 깨어짐을 견디지 못하고 방어하느라

정신없는 세상 속에 그냥 날 던질 수 있는 용기가

모두에게 조금씩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요?”


철학의 기조도 이제는 이기심을 견디질 못하며 나의 존재가 비로소 타인으로 완성되고, 타인이 자기 자신이자 세계라는 사실을 일깨우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함께해야 한다, 누구도 오롯이 혼자 완전할 수 없다. 세계의 행복 총량을 위해 기꺼이 사랑하는 세상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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