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수 폭포, 아르헨티나
모든 드라마가 끝난 뒤에는 슬픔이 찾아온다, 는 말을 좋아한다.
파티가 끝나고, 빌려온 접시들을 모두 이웃들에게 돌려주고 나면
빈 집에 홀로 멍하니 서서
"자,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그 순간,
슬픔은 그렇게 밀려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관계 안에 있을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슬픔이라기보다 분노와 질투, 역겨움과 사랑 뭐 그런 것들에 가까운 것이다. 그 감정들이 다 씻겨져 나가면 그다음 슬픔이라는 감정이 손을 들고 찾아온다. "끝난 줄 알았지? 내가 아직 남아있어. 그리고 이게 진짜 고통의 시작이야." 이런 말들을 하면서.
출근 시간 지하철 안에서, 홀로 점심을 먹다가, 집 앞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슬픔은 그렇게 도둑발로 슬금슬금 찾아온다.
남미에 오기 전, 세상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나라는 아르헨티나였다. 체 게바라의 나라이자, 탱고의 나라이자, <해피투게더>의 나라. 가보지 않았지만 어떤 곳인지 너무나도 잘 알 것만 같았다. 쓸쓸하고 외롭고 울적한 곳. '슬픔이라는 감정을 나라로 만들었다면 분명 아르헨티나일 거야'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뭉개버리는 말.
우리 다시 시작하자
기나긴 교향곡을 다 연주했다고 생각했는데 악보 끝에 도돌이표가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 너무나 괴롭고 힘들지만 숨 한번 고쳐 쉬고 다시 악보의 처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
'다시 돌아가서 새롭게 연주하면 분명 더 잘 연주할 수 있을 거야', '실수했던 부분들이 어딘지 이제 알았으니 만회할 수 있어', '더 나빠질 것도 없잖아? 더 나은 연주를 하는 일만 남은 거야'
하지만 돌아가 다시 하는 연주는 첫 연주에서 실수하지 않고 매끄럽게 넘겼던 부분에서 조차 실수를 하게 된다. 집중력이 흐트러져서, 남아있는 힘이 없어서, 반복되는 음표들에 흥미가 떨어져서.
그렇다고 악기를 내려놓을 용기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계속 연주를 하는 일. 하염없이 울면서 그렇게 바이올린을 켜고, 플루트를 불고, 피아노를 치는 일. 후련하게, 멋지게 떠나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어서.
손에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손에 피가 나는 줄 알면서도 달리 방법이 없어서.
아르헨티나에서는 꼭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영화에 나왔던 저 Quilmes 맥주를 마셔 보기, 악마의 목구멍이라 불리는 이과수 폭포와 세상의 끝이라 불리는 우수아이아에 가보기. 그리고 그곳에 슬픔을 묻어 놓고 오기. 뭐 그런 것들.
실제로 가본 아르헨티나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깊고 방대한 슬픔을 품고 있는 땅처럼 느껴졌다. 때때로 감당이 안 돼서 그 무게에 짓눌리는 기분도 들었다. 왜 였을까. 슬픔에 압도당하는 그 감정은 무엇으로부터 온 것일까. 계속해서 생각해보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영화의 원제는 <춘광사설>이다. 구름 사이로 잠깐 비치는 봄햇살.
사랑에 대한 은유겠지.
부코스키는 사랑을 해뜨기 직전, 어둠 속 찾아온 안개처럼 우리 곁에 잠시 왔다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라 표현했다. 사랑은 현실이라는 빛에 타 버리고 마는 안개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왜 아무도 저들에게 말해주지 않았던 거지? 사랑의 본질이 원래 그러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걸 알았다면 보영과 아휘는 좀 덜 슬플 수 있었을까?
그걸 알았어도 사랑의 끝은 똑같이 쓰라리고 아프며 슬플 수밖에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