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은 서점의 영업이 끝난 오후 7시에 시작했다. 수업 시간이 다가오자, 열 명 남짓한 사람들이 큼지막한 나무 책상을 둘러싸고 앉았다. 마치 서점의 여기저기에서 끌어온 의자들처럼 나이도 직업도 모두 다른 사람들이었다. 손님이 모두 빠진 서점은 고요했다. 창문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그 시간이 참 신기했다. 다른 곳에선 그냥 지나쳤을 것만 같은 타인들과 옹기종기 모여 글을 쓰겠다고 앉아있는 시간이.
나에게 5월은 ‘동쪽 글쓰기 수업 대모험’의 달이었다. 처음에 신청할 때만 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총 4회차니까 동쪽 나들이 가는 느낌으로 가볍게 다녀와야지 했다. 그러나 1회 차만에 이건 가벼운 나들이일 수가 없다고 결론지었다. 서점까지 버스로 한 시간 반 걸려 가는 일은 그렇다 쳐도, 수업이 끝나면 버스가 아예 끊겨버렸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 수업이 끝나면 주변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자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의 이틀을 꼬박 쓰는 스케줄이었다.
그래도 매번 글쓰기 수업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정해진 시간 동안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합평을 들었다. 내 합평 순서가 다가오면 항상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이슬아 작가가 글방 모임에서 남의 글에 열등감을 느낀 적이 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는데, 내가 딱 그랬다. ‘잘했다’ 한 마디 듣지 못한 날은 괜히 시무룩해졌고 옆에 앉은 사람이 칭찬을 받으면 그게 그렇게 부러웠다. 내가 이렇게 남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매는 사람이었나 싶었지만 글 쓰는 일에는 왠지 욕심이 났다. 다른 사람이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나 스스로도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글 쓰는 일만큼은 잘하고 싶었다.
합평이 끝나면 작가님은 짧은 피드백과 함께 글에서 나타난 작법에 대해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인칭 대명사를 쓰면 어떤 효과가 있어요, 문단의 구조를 이렇게 바꾸면 더 좋을 것 같네요 하는 식의 이야기였다. 그러다 창 밖을 보면 어느새 해는 지고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관광객들의 소리는 모두 사라지고 풀벌레 소리만 들리는 밤, 작가님이 우리에게 물었다.
“여러분은 글을 왜 쓰세요?”
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어서요, 글을 쓸 때 몰입하는 시간이 좋아요. 일기부터 독립출판까지 다양한 쓰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대답했다. 휴무 이틀을 글쓰기 수업에 바치는 게스트하우스 스탭도 골똘히 생각했다. 나는 왜 글을 쓸까.
내 의지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때부터였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시켜서 쓴 일기를 스스로 시작하게 될 줄이야. 눈에 띄지 않는 검은색 학생 노트가 내 일기장이었다. 오직 우울함을 덜기 위해 쓴 글이었다. 일기장에 내가 나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구체적으로 나의 어떤 점이 싫고, 오늘 어떤 일이 있어서 내가 너무 싫었는지 썼다. 그렇게 다른 누가 아닌 종이 쪼가리를 감정 쓰레기통 삼았다. 그때는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인 듯 보였다. 독서실 서랍장을 열기만 하면 다른 누구에게도 피해 주지 않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내가 얼마나 가치 없는 사람인지 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가 끝난 이후에는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글을 쓰고 싶지 않아 졌다는 게 그때는 내가 그만큼 잘 지낸다는 증거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글 쓰는 일을 피했다. 정말 글을 쓰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자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평생 글을 쓰고 싶지 않기를 바랐다. 글 쓰는 일은 고통이니까. 매번 내가 펜을 들 때면 다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응어리가 있었으니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유럽 배낭여행 때부터였다. 나 혼자 떠나는 여행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무엇이든 쓰던 감각이 남아 있는 건지,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일기였다. 영상이나 사진보다, 종이에 펜으로 적는 일기가 나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매일 밤마다 숙소 침대에 엎드려 일기를 적었다. 그때는 내 감정을 쏟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큰맘 먹고 떠나온 유럽 여행의 하루하루를 잊지 않기 위해 썼다. 여행을 다니면서 겪었던 좋은 일, 나쁜 일, 유럽에서까지 나를 괴롭히는 고민들이나 새로운 고민들까지 모두 적었다.
내 책장에는 2019년 유럽 배낭여행부터 쓴 일기장부터 지금까지 쓴 노트들이 줄을 지어 꽂혀있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우울하지 않아도, 별다른 일이 없어도 일기를 썼다. 90일간의 반강제적인 글쓰기는 그렇게 내 삶에 계속 그 흔적을 남긴 것이다. 평생 쓸 일이 없길 바랐던 글은 다시 나에게 찾아왔다. 다만 이번에는 다른 모습이었다. 글은 독서실 구석에서 울며 끄적이던 자기혐오의 결실이 아니라 매일의 일상을 담는 수단이자, 습관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도 글을 쓴다.
“글을 쓰고 읽다 보면 결국 내가 모르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게 돼요. 나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도 나지만, 가장 잘 모르는 사람도 사실 나거든요.”
사람들의 대답을 들은 작가님은 그렇게 말했다. 지금 2022년의 나, 남원에서 구좌까지 버스를 타고 글쓰기 수업에 온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나는 글을 잘 쓰고 싶다. 이 일을 계속하다 보면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언어로 서술할 수 있고 이를 직시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 나에 대해, 다른 사람에 대해, 내가 쓰고자 하는 많은 것에 대해 마음을 다해 생각하는 사람. 무엇을 쓸지 생각하고, 적절한 말로 표현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만큼 다듬는 시간을 충분히 감내한 사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쓴다. 쓰는 순간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 마주하고 이를 견뎌야 하지만, 글자들이 종이에서 빠져나와 나를 옥죄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쓴다. 이 시간들이 어떻게든 나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리라 믿는다. 독서실 구석에서 내가 얼마나 싫은지 쓰던 시간을 벗어나게 하고, 우울해지기 싫어 쓰지 않던 시기를 벗어나게 하고, 끝내는 스스로를 자라게 하리라 믿는다. 그러다보면 언젠가 내가 나를 좀 더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가치 없는 사람이라 쓰던 그 때가 무색하도록,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매일을 쓰고 고치는 내 모습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