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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와 돈, 그 함수관계

당신의 우선순위는?

by 소율


당신의 우선순위는?


해외여행의 문턱이 전에 비해 낮아졌다. 저가(저비용)항공이 출현하고 배낭여행이 일반화되면서 생긴 경향이다. 여름휴가가 몰리는 7, 8월에는 국내여행보다 동남아 쪽의 여행경비가 더 저렴하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해외여행은 경제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인식이 남아 있다. 단지 돈뿐만이 아니라 의지와 용기, 정보와 시간, 체력 등 조금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 유리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모든 조건이 완벽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가방을 꾸릴 수밖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여행자와 돈 문제에 대하여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당신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무엇을 하고 안 하고의 결정은 무엇이 우선순위인가에 좌우된다. 한정된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마찬가지다. 낡은 구두는 10년째 바꾸지 않더라도 매달 들어가는 책 구입비를 절대 줄일 수 없는 사람이 있고, 먹는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고급 자전거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도 여행에 관심이 없다면 굳이 여행에 돈을 쓰지 않을 것이고, 넉넉한 형편이 아니어도 여행이 최우선순위라면 어떻게든 다른 지출을 줄이고 여행을 선택하지 않을까? 다른 데 쓸 돈은 있지만 여행에 쓸 돈이 없다면 그만큼 여행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무엇이 내게 최우선이고 무엇이 가장 중요하냐에 따라 ‘돈이 있고 없고, 돈을 쓰고 안 쓰고’가 정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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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업주부라면


전업주부라면 자신의 여행을 위해 경비를 마련하는 것에 심리적 부담을 느낀다. 다른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족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쓰지만 자신을 위해서 쓰는 돈은 어쩐지 인색해진다. 돈을 벌지 않는다는 위치가 그렇다. 누군가 눈치 주는 사람이 없어도 스스로 위축되는 게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돈을 버는 노동은 인정하지만 돈을 벌지 않는 돌봄 노동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업주부가 살림을 하지 않는다면 결국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노동력을 사야 한다. 그러면 얼마의 비용이 필요할까. 육아와 가사노동을 입주 도우미로 해결한다면 월 200만 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물론 이건 주말과 휴일을 제외한 상황이다. 전업주부처럼 퇴근도 휴일도 없이 24시간 365일로 계산한다면 얼마일까? 그밖에 입주 도우미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시댁 등 주변 가족들 관계유지에 필요한 육체노동과 감정노동, 가정경제 관리까지, 도대체 얼마나 들지 가늠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런 계산을 떠나서 기꺼이 전업주부로 살아가는 이유는 돈으로는 환산 불가능한 '그것' 때문이다. 가족들과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주고 받으며 가정의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 바로 그 지점이다. 가정과 가족을 ‘살리는 일’이 ‘살림’이고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것을 잊지 말자. 이렇게 중요한 살림을 잘 하려면 주부 자신이 (가족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현명하게 돌볼 줄 알아야 한다. 엄마가, 아내가 행복해야 남편도, 아이들도 행복하다.


비행기를 타면 이륙하기 전 늘 같은 안내방송을 한다. 만약의 사고가 났을 때를 대비한 안전 매뉴얼이다. 꼭 엄마가 먼저 산소마스크를 쓰고 나서 아이를 도와주라고 나온다. 아무도 그걸 이기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이 엄마와 아이 둘 다 살릴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혹시 이걸 비상상황에서만 통하는 매뉴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이 당연한 상식은 일상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주부가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갖는 건 가정을 건강하게 꾸려나가기 위해 꼭 필요한 안전매뉴얼이다. 자신을 위해 시간도 쓰고 덤으로 돈을 좀 써도 괜찮다. 월급까지는 아니더라도 용돈 정도는 스스로에게 주도록 하자. 아니 용돈만큼은 꼭 확보하길 바란다. 가족 말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쓸 수 있는 용돈이 필요하다. 그게 우리의 여행경비가 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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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 잠깐의 직장생활을 제외하고 나는 내내 전업주부였다. 아들과 함께 세계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가진 돈이 있을 리 없었다. 남편은 여행을 반대했던 터라 남편에게 손을 내밀 수는 없었다. 하늘에서 목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경비는 내 손으로 마련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했다. 당시 전업주부 15년 경력의 내가 돈을 마련할 방도는 오직 ‘아끼는 것’밖에 없었다. 늘 쓰던 생활비에서 약 15%를 줄여서 그걸로 적금을 들었다. 적금은 자동이체를 걸어놓아 아예 원천봉쇄를 시켰다. 이게 말로는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살림을 해본 사람이라면 짐작할 수 있다. 원래부터 생활비가 넉넉했다면 모를까, 빠듯한 생활비를 줄이는 건 거의 아트 수준의 기술이 필요했다. 이미 짠순이로 소문난 나였지만 거기서 더 지독한 짠순이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아무리 줄여도 줄일 수 없는 품목이 있는데 바로 식비와 교육비다. 어쨌거나 밥은 먹어야 하고, 아이는 가르쳐야 하니까. 그밖에 다른 일에서는 마른 행주를 쥐어짜고 허리띠를 졸라매었다. 이렇게 3년을 모아 최소한의 여행 종자돈을 마련했다. 그만큼 절실했고 그만큼 여행을 원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로 나는 매달 나에게 자신만을 위한 용돈을 준다. 그것을 모아 해마다 여행자금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행적금이 효자


여행을 하려면 많든 적든 돈이 든다. 여행을 가고 싶을 때마다 필요한 경비를 선뜻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평소에 여행용 적금을 들어두면 편리하다. 반드시 월초에 자동이체를 시켜 놓아야 한다. 그래야 있는 듯 없는 듯 돈이 모인다. 쓸 거 다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하려고 하면 백승백패. 요즘은 워낙 이율이 낮으니 이자는 기대하지 말고 그냥 돈을 모은다는 의미로 이용하자.


우리 사회에서 여행은 아직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스러운 취미생활’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여행을 막연히 상상할 때는 아주 많은 돈이 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막상 여행을 가는 데에는 생각보다 큰돈이 들지 않는다. 동남아시아, 중국, 일본, 대만 등 인근 국가라면 100만 원 정도로 짧으면 삼사일에서 길면 열흘까지의 여행이 가능하다. 물론 어떻게 여행하느냐에 따라서 여행경비는 천차만별로 달라지지만 저렴한 배낭여행이라면 100만 원으로 충분하다. 한 달에 10만 원씩 적금을 들면 1년에 120만 원이다. 이 정도면 도전해 볼 만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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