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매일만보

만 보를 채우는 세 가지 잔기술

by 소율

요즘 하루에 만 보 걷기를 하고 있다.

3월에는 15일을 걸었다, 반타작이다. 4월은 어제(12일)까지 총 10일을 걸었으니 이전 달보다는 발전했다. 만 보를 걸으면 (나는 걸음이 느린 편이어서) 6km가 된다. 걷기는 나에게 있어 아주 오래된 (25년 동안의) 운동이자 취미 생활이다. 이건 내가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환경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결혼해서 과천에 살면서부터 생긴 습관이니까.



알다시피 과천에는 서울대공원이 있기에 시민들은 대공원을 동네 사유지처럼 만만하게 느낀다. 아들이 아장아장 제 발로 걷기 시작할 때부터 유모차 끌고 대공원을 드나들었다. 아이가 오전에 어린이집에 가게 되자 혼자서 또는 동네 친구와 대공원을 한 바퀴씩 돌곤 했다.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아침에 혹은 저녁에 대공원을 걷는다. 시내의 자기 집에서 출발하여 대공원에 들어가 호수를 둘러 한 바퀴 걷고 오면 대략 1시간 정도 걸리므로 가벼운 운동으로는 딱 좋다. 사실 운동보다는 산책에 가깝지만.


다른 운동은 막상 시작해도 이런저런 이유로 몇 달을 유지하기 힘든데 걷기만큼은 부담 없이 즐기고 있다. 여타의 준비물이 필요 없지 않은가. 두 다리만 있으면 그만이다. 어떤 해는 한 달에 몇 번 못 걷기도 했지만 끊어졌다 이어졌다 리듬을 타며 25년을 이어오고 있다. 솔직히 2016년 일을 시작하고부터 많이 소홀해지긴 했다. 특히 2017년과 2019년은 아예 운동에 손을 놓았다. 몇 년 새 체중이 5kg이나 불었는데 키가 작은 나로서는 남들로 치면 10kg이 찐 거나 마찬가지였다. 올해는 좀 열심히 걸어보려 한다. 아니 반드시 걸어야 한다.


나는 하루에 만 보라는 계획을 세웠다. 기필코 살을 빼야겠다는 결심에 비해 부족한 것 같지만 일단 이거라도 잘해보자는 마음이다. 그럼에도 가끔 어떤 날은 8천 보나 6천 보가 되기도 한다. 어떻게든 만 보를 채우려고 궁리하다가 잔기술이 늘었다. 보통은 점심 식사 후에 1시간 정도 걷는데 이걸 못할 때가 있다. 피치 못할 사정인 경우, 하루 정도 건너뛸 수도 있지만. 괜히 내키지 않는다거나 하는 등의 ‘단순 변심’ 일 경우에는 ‘환불 불가’ 상태로 만든다. 즉 꼭 나가야만 하는 일을 일부러 만드는 것이다.


좋은 예로 도서관 대출신청 같은 것. 집 앞 문원도서관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정보과학도서관에다가. 요즘 코로나 여파로 도서관이 휴관 중이지만 인터넷으로 대출신청을 하면 1층에서 책을 빌려준다. 대출자에 한해서 1층 로비만 5시간 동안 개방하고 있다. 단, 이틀 안에 찾아와야 한다. 기간과 시간을 맞추어 책을 가져와야 한다는 목적이 있으므로 어쩔 수 없이 가게 된다. 내 사무실에서 왕복하면 4천 보가 나온다. 벌써 반 가까이 채워지니 한결 맘이 가뿐하다.


다른 방법으로는 실내 걷기가 있다. 이건 날이 춥거나 미세먼지가 지독해서 도저히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을 때 유용하다. 사무실 안에서 영어회화나 팝송을 따라 하며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실평수 4평에 불과해서 다람쥐 쳇바퀴 돌듯 종종거린다. 혼자이기 때문에 그나마 가능하다. 아래층 상가 점포가 신경 쓰이므로 더 조용한 제자리 걷기도 한다. 제자리걸음도 걷기일까, 이까짓 제 무슨 운동이 될까 싶지만 암 것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낫겠지. 무한 긍정 모드로 자신을 위로한다. 역시 식후 소화, 운동, 영어 연습까지 일석 삼조의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마지막 신의 한 수는 제자리 뛰기다. 책 <걷는 사람, 하정우>에서는 '제뛰'라고 하더군. 밖에서 만 보를 못 채우면 집에 돌아와서라도 채워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집은 1층. 조심해야 할 아래층이 없다. 마음껏 뛰고 싶지만 그러기엔 집이 좁디좁다. 헬스장을 다닐 때도 달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겁이 났다. 걷기에다 대면 고난도의 기술이 아닌가. 러닝머신 위에서 걷다가 어쩌다 기분 좋을 때 1분 정도만 뛰어도 대단한 날이었다. 그 이상은 못 하겠더라. 집에서 하는 제자리 뛰기는 훨씬 느리고 엉터리인 탓에 부담이 없다. 어쨌거나 만 보만 차면 그만이니까. 남편이 넷플릭스를 켜면 옆에서 같이 보면서 뛴다. 정신 사납다고 타박해도 굴하지 않는다. 혹시 그가 짜증을 내려고 하면 얼른 주방 쪽으로 도망간다. 어느새 만 보가 되면 어찌나 뿌듯한지.


사무실과 집에서 하는 실내 걷기는 나에게 ‘유레카!’ 수준의 발견이었다. 내가 유별나게 추위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날씨가 추우면 무조건, 무조건 밖에 나가기 싫어진다. 한겨울은 물론이고 4월 초까지의 봄추위에도 나는 움츠러든다. 특히 찬 바람 쌩쌩 부는 날은 오우 노노. 대안으로 헬스장이 있으나 코로나 사태로 요즘 문을 열지 않으니까. 하긴 겨울에 헬스장을 가려면 어쨌거나 집 밖에 나가야 하는데 헬스장까지 가는 동안의 추위가 싫어서 많이 빠지기도 했다. 이렇게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걸을 수 있는 걸 그때는 몰랐다. 목마른 자가 우물 판다고, 궁하면 통하기 마련인 것을.



목표는 뭘 하든 만 보를 채우는 거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따뜻하여 사무실까지 걸어왔다. 편도 2km, 3400보에 30분이 걸렸다. 점심먹고 나서 시내 중앙공원을 왕복하니 또 2km 추가되어 6900보. 이따가 집에 돌아가면 딱 만 보가 되겠다. 실은 초보운전자이기에 운전 연습을 하려고 그동안 차로 출퇴근했더랬다. 이젠 운전이 익숙해졌으니 짐이 없는 날은 걸어 다녀야겠다. 게다가 이번 주부터는 퍽 따뜻해져서 밖에서 걷기에 참 좋은 계절이 돌아왔다.


만 보의 잔기술을 연마하며 그런 생각이 들더라. 제자리 걷기도 제자리 뛰기도 엄연한 전진이구나. 겉으로는 제자리에만 있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움직이는 거구나. 전례 없이 힘든 이 시기, 모든 강의가 중단되고 작업이 끝난 세 번째 여행책의 출간마저 기약 없이 미뤄지고 주변에서는 사무실을 접으라 조언하는 이때. 나는 일상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소소하게 매일 읽고 쓰고 걸으면서. 내가 지금 하는 것이 제자리 걷기, 제자리 뛰기로구나.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결국은 앞으로 나아가는 거니까. 잔기술은 진(眞)짜 진(進)기술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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