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산다는 것

by space b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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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말과 맞닥뜨리면 막연해질 때가 있다.

말뜻은 알지만 어디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한 발도 뗄 수가 없다.

요즈음은 '느리게'란 말이 자주 들린다.

하루라도 빨리 '느리게' 살아야 한다고 얘기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느린 것인지 나는 솔직히 알지 못한다.

도시에 비해 외관상으로는 느려 보이는 시골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렇다.

걸음도 늦게 걷고 말도 천천히 하고 일도 느릿느릿하게 하면 느리게 사는 것에 해당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다 보면 느리게 살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은 든다.

그런데 고개를 끄덕이고 나면 그다음이 묘연해진다.

느리게, 느리게.. 계속 중얼거려 보아도 모르겠다.


무엇과 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느리게'란 말은 덩그러니 떨어져 있는 섬과 같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얘기하기 어려울 때는

반대편을 힐끔 바라보고 '그것이 아닌'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국민학교 국어시간같이 반대말 줄 긋기를 해보면 느리게의 반대는 '빠르게'이다.

느리게 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빠르지 않게', '덜 빠르게' 정도가 세상의 박자에 따라가야 하는 우리에게는

더 솔직하고 구체적인 느낌이다.


'느리게'라는 말이 등장하면 따라오는 단어들이 있다.

웰빙, 로하스, 에코, 지속가능, 친환경, 유기농, 흙집, 텃밭... 그리고 가끔 인디언,, 빠빠라기도 등장한다.

슬로라이프, 슬로푸드, 슬로머니, 슬로시티, 자전거, 걷기, 게으름, 흙, 농사...

이런 리스트에 나와있는 그 많은 상징들을, 시각적으로 슬로하게 보이는 것들을 행하면 슬로라이프가 가능할까?

염전, 한옥마을, 돌담길, 지렁이 농법, 자연휴양림...

슬로시티를 지정할 때 간판이 된 이유들이다.

방향으로서, 메시지로서는 의미 있는 일이고 세상에 이런 형태의 생산과 삶이 늘어가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이런 큰 얘기들은 대부분 삶의 구조변경과 장소의 방문에 대한 것이다.


지하철에 피곤한 몸을 싣고 퇴근하는 이들의 바로 저 시간,

우리들이 꾸려나가야 하는 그 일상에 나는 관심이 간다.

말리는 사람이 더 밉다는 말과 같이 뛸 수밖에 없는 이에게 걸으라고 더 느리게 걸으라고 하는 것은 애꿎다.

삶의 구조와 상황은 그대로인데 리스트에 있는 무언가를 하고 슬로시티를 방문한다고 해서 느려진 삶이 되지는 않는다.

느린 무엇인가를 행하고, 흙집에 살고 , 농사를 짓고, 자연휴양림을 걸으면서 삶에 느린 것에 해당하는 콘텐츠를 늘리고 한발 더 나가 삶의 하드웨어를 바꾸고 표피를 달리 하여도 삶은 느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바쁜 일상에서 탈출하여 휴식을 위한 여행을 떠나곤 한다.

멋진 휴양지가 기다리고 있다 하여도 도착 전이라는 이유로 길 위에서 보내는 시간이 무의미했다면 뜨거운 태양 밑에서 느긋하게 드러누워 유기농으로 재배된 천연 과일주스를 빨대로 천천히 빨아먹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제주도 올레길을 걸으며 올레길의 모든 코스를 완주해 내겠다는 목표로, 오늘 걸어야 할 양을 채우느라

길가의 들꽃도 보지 못 하고 시골 할머니들의 얼굴에 파인 깊은 주름과 삐뚤어져 버린 몸을, 그들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보지 못한다면 느린 여행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제주도 올레길의 전 코스 완주가 느린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의도적 완주와 결과적 완주는 결과는 같지만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결과적 완주에는 길의 냄새가 묻어 있다.


느리게.

속도의 얘기로 받아들이지만 어차피 속도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기에 느린 삶이란 것은 실체가 없다.

시선의 문제다. 마음이 어디를 보는 가의 얘기이다.

결과를, 도착만을 바라보면 어쩔 수 없이 현재와 가야 할 그곳과의 Gap으로 마음은 숨 가쁘다.

우리의 삶은 어딘 가를 향해 걸어간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더라도, 혹 도착하지 못할 지라도

그 과정을 즐기고 길의 냄새를 맡을 수 있다면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이 덜 바빠질 수도 있겠다.

살다 보면 결과가 절실하고 그러다 보면 대부분 바빠진다.

'필요'라는 것이 결과를 간절히 원하게 만들고

내 안에 남이 너무 많이 들어와 있는 때도 그러하다.

필요를 줄일 수 없다면 , 비용을 줄일 수 없다면, 남에게 하는 여러 형태의 표현을 멈출 수 없다면

뒷감당을 위해 우리는 다시 바빠진다.

마음을 아무리 추슬러도 과정을 즐길 수 없고 길 냄새도 도저히 맡을 수 없다면

그 삶은 필요가 결과를 압박하는 구조이다.

궤도에 올라탄 폭주기관차가 될 수밖에 없다.

이럴 때는 공중 삼회전의 묘기를 부려 삶을 느리게 해 보려 해도 가능하지 않다.


이런 날이 오면

햇빛 좋은 어느 봄날에

잠시 멈추어 서서

그 대단한 필요를 덜어내기 위한 삶의 혁명을 생각해 볼 일이다.


덜 바쁘게 살기를 혹 원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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