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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Sep 05. 2022

9월 5일 조정우의 하루

문서 정리

새로운 회사에 온 지,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회사 업무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그다음부터는 회사의 체계를 잡는 것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사실 체계를 잡는다는 말부터가 사치인 것 같다. 지금 이 회사는 체계라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회사에 오게 된 계기는 대표와의 오랜 인연 때문이었다. 이 회사는 회사 선배가 차린 회사로 선배는 나에게 회사에 대해 많은 도움을 구했었다. 내가 기존에 하는 일이 컨설팅이었기 때문에 나는 선배에게 가벼운 조언 정도를 했었다. 선배가 나에게 돈을 주면서 요청한 것은 아니었기에 나도 너무 깊게 선배의 회사에 관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선배는 그런 것도 고마웠는지 작년부터 나에게 회사에 합류할 것을 제안했었다. 나는 선배의 제안을 계속해서 거절했지만 선배는 끈질겼다. 결국 나는 선배의 제안을 승낙했다. 

회사에서 내 직함은 이사가 되었다. 실제로 하는 일은 운영 총괄 본부장급이었다. 선배, 아니 대표는 영업에 특화된 인물이라 돈을 따오는 데는 굉장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지만 운영 측면에서는 영 아니었다. 내가 가벼운 컨설팅을 할 때도 느끼기는 했지만 실제로 회사에 와보니 내부는 엉망진창이었다. 체계가 없다 보니 업무는 중구난방이었고 직원들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스타트업이라고는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문서들이었다. 직원들마다 문서를 정리하는 방법이 다 달랐고 그나마도 자신들의 컴퓨터에만 저장된 것들이 많아 업무 공유를 받기도 어려웠다. 업무에 활용하는 서비스들은 있기는 했지만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고 업무 파일을 개인 메신저로 주고받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업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고 담당자가 아니면 업무에 대한 이해도도 굉장히 낮아 결국 업무의 결과에도 큰 영향을 주고 있었다. 

나는 며칠 동안 밤을 새우면서 이 회사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업무 파일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했다. 대표에게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고했지만 대표는 시큰둥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꼭 필요하냐고 되물었다. 그때 처음으로 나는 회사에 내가 잘못 온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에게 권한과 책임을 줬으면 대표가 나를 지지해줘야 하는데 이 대표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표가 나를 지지하든 아니든 간에 회사 업무에 있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기에 나는 대표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결국 대표는 내 마음대로 하고 어떻게 정리했는지만 자신에게 보고해달라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회사의 개혁을 담당하게 되었다. 회사의 업무가 잘 돌아갈 수 있게 문서를 정리하는 방법과 틀을 직원들에게 배포했다. 그리고 직원들을 한 곳에 모아 내가 어떤 뜻에서 이 일을 진행했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업무를 정리하면 되는지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했다. 내 설명이 끝난 후 몇몇 직원들은 나에게 찾아와서 업무의 틀을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전했다. 그들도 그동안 굉장히 답답해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모두가 내 개혁을 마음에 들어 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까지도 업무를 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나 때문에 귀찮은 일이 늘었다고 생각하는 부류도 있었다. 물론 그들이 나에게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의 불만은 뒤에서 돌고 있었다. 그게 내 귀까지 들어온 게 문제였지만….

업무 프로세스를 잡은 후부터 회사 일은 이전보다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업무를 진행하는 속도는 더 빨라졌으며 직원 대부분이 업무에 대해 잘 이해하고 일을 할 수 있었다. 여전히 기존의 업무 방식을 고수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만 대표가 내가 만든 방식대로 일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업무 개선안을 보고했을 때도, 업무 개선안을 전체 직원들에게 적용시켰다고 보고했을 때도, 그리고 현재 업무가 어떻게 개선되었는지를 보고했을 때도 대표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는 오히려 이게 지금 중요하냐면서 자신이 시킨 일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를 물었다. 물론 나는 대표가 시킨 다른 업무도 문제없이 처리했다. 하지만 대표는 어떻게든 내가 하는 일에 꼬투리를 잡으려고 했다. 내가 필요하다고 제안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나를 걸리적거려하는지…. 나는 대표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업무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는 오늘, 대표는 나를 따로 점심을 먹자며 불렀다. 대표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뭐가 그리 불만인지 이런저런 투정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그동안 안 한 것들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듣고 있으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일단 시간 상 도저히 처리가 불가능한 것들이 많았고 단계로 봤을 때도 지금은 하나마나한 일들도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이제 일을 한지 한 달이 되는 사람이었고 그렇다고 일을 안 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한 달 사이에 굉장히 많은 일을 했다. 

보통 때는 그저 “예.”라고 대답하고 넘어갔겠지만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대표의 말에 모두 반박했고 서운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말했다. 대표는 크게 한숨을 쉬면서 내 태도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도저히 대표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후,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이대로 회사를 다니는 것이 맞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새 회사에 대한 정이 생겼는지 내가 떠나면 회사가 다시 엉망진창이 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있다고 해서 대표의 태도가 저런 식이면 개선되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졌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나는 오늘도 퇴근할 수가 없었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야근을 하고 있는데 대표가 나를 다시 불렀다. 

대표실로 들어가니 대표는 진지한 표정으로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어이가 없었다.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나가라니? 하지만 대표가 직접 그런 말을 하니 나도 더 이상 미련이 없어졌다. 나는 대표에게 “처음으로 우리 생각이 맞네요.”라고 말하고 추석 전에 자리를 정리하고 퇴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대표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오라고 하는 회사도 많았고 원래 다니던 회사도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도 여기까지 온 나를 자신의 방식과 맞지 않다면서 쫓아내는 대표를 보니 이 회사의 미래도 어떻게 될지 뻔하다. 회사에 좋은 직원들이 많은데 결국엔 대표 때문에 다들 그만두게 될 것이다. 그러면 아첨꾼이나 일을 못 하는 사람만 남게 될 것이고 좋은 인재를 구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회사를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대표의 태도를 보니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더 이상의 야근은 의미가 없기에 나는 바로 일어나 퇴근했다. 내일은 차를 가져와서 내 개인 짐들을 정리해야 할 것 같다. 이 회사에서 정말 오랫동안 있고 싶은 마음으로 왔는데 이제는 단 한순간도 이곳에 있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정말 질린다, 질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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