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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주 작가 Sep 24. 2022

9월 24일 정수원의 하루

가을 

생명의 시작을 알리는 봄, 지긋한 장마와 무더운 폭염의 여름을 지나면 우리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계절, 가을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가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다. 

어린 시절 나는 겨울을 좋아했다. 겨울은 내게 모든 것을 끝내는 계절 같았다. 학창 시절, 새 학년이 되면 나는 친구들과 잘 지내고 학업 관리도 잘하는 모범생이 되고 싶었지만 1년이 지나면 어떤 것도 이루지 못 한 실패자가 되어있었다. 내 성적표에는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찍혀 있었고 내가 속한 반에는 항상 꼴 보기 싫은 친구가 한 명쯤은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지만 게임처럼 리셋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겨울이 찾아오면 모든 것이 얼어붙고, 다시 봄이 되면 새로운 반으로 가서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나는 그래서 겨울을 기다렸다. 겨울 동안 완전히 내 모습과 체질을 개선해서 다가오는 봄에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다. 후회도 상처도 슬픔도, 다른 감정도 모두 추운 겨울과 함께 끝낼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울은 혹독했으며 나는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새롭게 시작한 친구들과의 관계가 최악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고 내 성적은 이제 후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수능이 끝난 겨울, 나는 원하는 대학교에 가지 못 했고 재수를 해야 했다. 한파와 함께 처음으로 재수 학원에 가는 날, 나는 겨울이 정말 싫어졌다. 겨울이 아니라 따뜻한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1년 간의 재수 생활 후, 나는 타협점을 찾아 대학교에 들어갔다. 고3 시절보다는 성적이 올랐지만 여전히 내가 원하는 대학교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시 공부를 하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지금의 성적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졸업장을 위해 찾아간 대학교의 봄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생활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새로운 인연, 그리고 처음 찾아온 사랑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봄이 좋아졌다. 그때는 세상의 모든 봄노래가 내 노래 같았다. 

봄의 이야기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짝사랑했던 사람에게 고백조차 하지 못 하고 간 군대에서 나는 그녀에게 고백할 날을 기다리며 언젠가 다시 찾아올 나의 다른 봄을 기다렸다. 하지만 전역하고 나서 그녀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봄날의 흩날리는 벚꽃과 함께 울었다. 

봄이라는 계절이 내 인생에서 특별한 의미가 되지 않은 것은 직장 생활을 하면서부터였다. 사실 봄뿐만 아니라 모든 계절이 그랬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특별한 이벤트가 생기는 어린 시절, 학창 시절과는 달리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새가 없었다. 더우나 추우나 얇기에 차이만 있고 무거운 기운의 건물에서 하루 8시간 이상을 살아야 했다. 그저 밤이 되기만을 기다렸고 밤이 찾아와 퇴근 시간이 되면 집에 가기에 바빴다. 그렇게 계절과 날짜 감각을 잃은 채 살다 보면 어느새 12월이 찾아왔고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었다. 


“무슨 계절을 가장 좋아하세요?”


몇 해 전, 누군가와 소개팅을 했을 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잠시 망설이던 나는 가을이라고 대답했다. ‘왜’ 냐고 묻냐는 그녀에게 나는 웃으면서 ‘그냥이요’라고 말했다. 사실 봄은 설레지 않았고 여름은 더워서 싫었으며 겨울은 견디기 힘들었다. 남은 것은 오직 가을이었다. 그래서 가을이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녀와 나는 단 한 번의 만남으로 끝이 났지만 계절을 물어본 그녀의 질문은 계속해서 내 마음속에 남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계절에 대한 감정이 다시 돌아왔다. 

소개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괜히 집에서 세 정거장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소개팅을 한 날이 가을이었고 가을을 오랜만에 느끼고 싶어서였다. 선선한 기운이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 오묘했다. 아무리 걸어도 지치지 않았고 오히려 몸을 가볍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날 나는 가을을 느끼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나는 가을이 정말 좋아졌다.


가을은 참으로 오묘한 계절이다. 가을에 느끼는 감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한다. 상쾌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이유 없이 우울하고 좌절감을 느끼게도 한다. 지나간 사랑이 생각나기도 하고 새로운 인연으로 설레기도 한다. 쉽게 피로하기도 하고 한 해가 어느새 끝나간다는 것 때문에 마음이 불안하기도 하다. 일을 그만두고 가을바람 아래서 책만 읽고 싶은 날도 있고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여러 감정이 있었지만 긍정적인 감정을 가질 때가 더 많다. 가을만 되면 이유 없이 걷는 것을 즐겼는데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목적지 없이 걸을 때도 많다. 특별한 목적지가 없어도 즐거운 게 가을밤의 걷기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목표를 가지고 행동하기 때문에 가끔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걷는 행동도 필요한 것 같다. 그리고 가을은 이렇게 걷기에 최적의 계절이다.


오늘도 나는 집에서 꽤 떨어진 역에서 내린다. 여전히 서늘했지만 어딘가 쌀쌀한 바람도 불어온다. 가을이 벌써 이별 준비를 하는 것 같다. 이제 9월인데…. 벌써 떠날 준비를 하는 가을이 야속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는다. 가을을 조금 더 느끼기 위해서다. 차가운 바람이 내 코 끝을 스친다. 이제 생각해보니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가을을 좋아했던 것 같다. 가을이 주는 특유의 설렘을 그때도 즐겼던 기억이 난다. 아주 어렴풋한 기억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한 나를 발견한다. 나는 시계를 본다. 이대로 집에 가기에는 너무 아쉽다. 나는 방향을 돌려 동네를 천천히 둘러보기로 한다. 오늘은 조금 더 걷고 싶다. 오늘은 토요일 아닌가? 조금은 더 여유를 부리고 조금은 더 가을을 만나도 괜찮은 날이다. 언제 또 좋아하는 계절이 변할지 모르지만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을을 조금 더 만끽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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