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임무
2033년 11월 3일 목요일.
정진우의 기록을 각색.
입사 3일 차.
원래는 어제부터 출근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제 아침 일찍 인사팀에서 출근하지 말라는 연락이 왔다. 인사팀 한수의 연락이었다.
“안녕하세요. 아침 일찍부터 연락드려서 죄송해요. 그리고 이런 말씀드려서도 죄송하고요. 오늘 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진우 님은 내일부터 출근하시면 된다고 합니다.”
아직 잠에서 제대로 깨지 않은 나는 한수가 하는 말이 꿈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었고 회사 입사 이틀 차인 나는 회사의 사정으로 출근조차 못하는 직원이 되었다. 이쯤 되니 내가 진정 취업을 하긴 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정신을 좀 차리고 방 안을 살펴봤다. 내 룸메이트라는 준서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늦게 퇴근해서 나보다 먼저 일어난 것인가 했지만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이 방에는 나만 있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 기숙사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기숙사 밖으로 나오지 말라는 한수의 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숙사를 둘러보기로 했다. 기숙사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것이지 내 방에서 나오지 말라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숙사에는 다른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나만 출근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기숙사에 있는 매점에 갔다. 매점 직원은 나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나는 라면과 먹을거리를 골랐다. 매점에서 라면을 먹으려고 하니 직원이 숙소에 가서 먹으라고 했다. 나는 구매한 먹을거리를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에서 간단히 밥을 먹었다. 배가 불러오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제대로 취업을 한 것인가? 나는 이 회사를 추천한 청용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청용은 받지 않았다. 청용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내 메시지를 읽지 않았다. 그의 대답은 밤까지도 오지 않았다.
퇴근 시간이 되자 기숙사가 북적이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온 사람들이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들을 붙잡고 회사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그냥 그만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내일 출근하면 알 수 있겠지. 내일 출근은 할 수 있는 것일까? 내일이 되면 “미안하지만 진우 님. 이번 주는 그냥 쉬고 계셔야 해요.”라고 청용이 말할 것 같았다.
나는 침대에 누워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퇴근을 한 것 같은데 내 룸메라고 하는 준서는 오늘도 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회사에 일이 생겼다는데 준서라는 사람과 관련된 것인가?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하며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눈을 뜨니 다시 아침이었다. 일어나자마자 한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부터 죄송해요. 한수 님. 오늘은 출근하는 거죠?”
“네…. 아! 진우 님이구나. 네네 오늘 9시까지 1층으로 오시면 됩니다. 이따 봐요!”
출근…. 그래, 정말로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 마침내 다가왔다. 나는 신이 났다.
원래 출근 시간보다 일찍 1층 로비에 도착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들이 몇 명 보였다. 안내데스크로 추정되는 곳에는 마르면서도 키가 큰 여자들이 있었다. 내가 안내데스크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 그중 한 명이 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실례지만 누구 찾아오셨어요?”
그녀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을 걸었다. 친절하지만 나에 대한 경계로 가득한 말투였다.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아니,, 이틀 전, 아니 뭐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이번에 입사한 정진우라고 합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경계심을 어떻게든 낮추려고 했지만 오히려 더 수상하게 설명한 것 같았다.
“풉.. 아 네 안녕하세요. 저는 최가은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자주 인사드리겠네요.”
가은이라는 여자는 내 행동을 보고 웃음을 터트릴 뻔했지만 겨우 참고 말을 이어갔다. 그녀의 태도를 보니 나에 대한 경계심이 어느 정도 낮아진 것 같았다.
“아 네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은 인사팀 강한수 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한수 님 곧 오실 거예요. 여기에서 대기하고 계세요.”
가은은 안내데스크의 한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가은에게 감사를 표하고 잠시 안내데스크에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내데스크에 있던 또 다른 여자가 나에게 인사했다. 그녀는 머리를 묶고 있었는데 어딘가 모르게 생기가 없어 보였다.
“네. 안녕하세요. 정진우라고 합니다.”
여자는 나에게 목례로 가볍게 대꾸하고 자신의 앞에 있는 컴퓨터를 봤다. 나는 어색해서 앞을 봤다. 로비로 들어오는 수많은 직장인들을 볼 수 있었다. 이제 나도 저런 직장인 중에 하나가 된 것이구나.
“안녕하세요! 유진 님. 몸은 어때요? 괜찮으세요?”
한 남자가 커피를 내밀며 등장했다. 남자는 커피를 4잔이나 들고 왔다. 남자는 커피 중 하나를 유진이라는 여성에게 줬다. 커피를 주다가 나를 발견하더니 잠시 그는 경계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어? 이 분은 누구? 새로 오신 직원 분?”
남자가 나에 대해 묻자 나도 모르게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입사한 정진우라고 합니다.”
괜히 긴장해서 그 남자에게 90도로 인사하고 말았다. 혹시 내 상사이면 어쩔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보급팀의 김선준이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그런데 안내데스크 직원 분치고는 키도 좀 작은 것 같은데?”
선준이라는 남자는 조금 기분 나쁘게 말하는 타입 같았다.
“그분은 한수 님 기다리고 있어요.”
가은이 끼어들며 말했다.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어느 부서로 지원하셨어요?”
선준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나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저는 비즈니스 직군으로 지원했는데…. 사실 무슨 일을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하하. 여기가 좀 그렇죠. 연구원들이 아니면 우리 같은 사무직들은 좀 경계가 묘해요. 비즈니스 직군이면 누구지? 아.. 은호 님이랑 같은 팀 될 수도 있겠네요. 자, 여기 가은 님 거.”
선준은 자신이 준비한 커피 중 하나를 가은에게 내밀며 말했다. 나는 이들이 대체 무슨 사이일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은호 님? 운영팀이시죠? 그분 좀 나이스 하신 것 같던데요.”
가은이 선준이 준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니 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진우 님? 여기 계셨구나. 가은 님, 유진님. 오 선준 님도 여기 계시네요. 다들 잘 지내시죠? 그럼…. 진우 님. 저 따라오시죠!”
나를 구해준 것은 한수였다. 그가 너무 반가웠다.
“그럼 이제 가볼까요?”
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를 돌봐준 가은과 유진, 그리고 선준에게 인사하고 한수를 따라 출입 게이트 쪽으로 이동했다.
“보안 카드는 제가 올라가서 따로 드릴게요. 우선 저 따라서 들어오시면 됩니다.”
한수의 안내를 따라가니 이번에는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엘리베이터는 10대 이상이나 있었다. 꽤 많은 규모에 나는 놀랐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저층부와 고층부 운행, 그리고 수수께끼의 알파벳이 같이 혼용된 펫말이 있었다.
“저랑 가실 곳은 A-고층부예요. 다른 엘리베이터를 타셔도 되긴 하는데 진우 님은 A로 된 엘리베이터를 타신다고 기억하고 있으시면 됩니다.”
“무슨 차이가 있나요? 접근 가능한 구역을 구분한 거라서요.”
“아… 예를 들어 12층은 어떤 레벨 접근 권한을 가진 분만 들어갈 수 있는 형식인 거죠?”
“꼭 그렇지는 않아요. 예를 들어주신 12층은 A레벨과 B레벨이 모두 갈 수 있어요. 물론 12층에 가면 A구역과 B구역으로 구분되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A레벨이 B레벨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층에 오면 그것들은 다 기록이 되어요. 허가되지 않은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처음부터 관찰하고 있다고 보시면 돼요. 좀 복잡하죠?”
“어차피 12층에 가서 구역이 구분되어 있으면 별 의미 없는 것 같기는 하네요. 말씀하신 원리가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닌데 의도는 잘 이해가 가지 않네요.”
“하하.. 여기가 좀 기밀들이 많아서요. 산업스파이 같은 사람도 있고 해서 그렇다고 봐주시면 됩니다. 자, 일단 엘리베이터 타시죠.”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 도착했다. 5층은 라운지 같은 공간이었다. 직원들이 빈백에 누워 자유롭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한 켠에는 시리얼을 꺼내 밥을 먹는 사람들도 있었다. 통유리로 된 어떤 방에는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여기는 그냥 보시면 알겠지만 휴식 공간이에요. 진우 님이 회사 생활하면서 자주 오시는 곳일 수도 있겠네요. 저도 여기 자주 와요. 게임도 할 수 있고 누워서 잠도 잘 수 있고, 이곳은 근무 시간에도 이용할 수 있어요.”
“근무 시간 도중에요?”
“네. 여기 쉬는 것도 다 근무 시간에 포함이에요. 이론 상 8시간 내내 여기서 놀고 있어도 출근할 걸로 인정되는 것이죠. 물론 그에 따른 업무적인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 일만 잘하면 2시간 일하고 6시간 여기서 쉬어도 괜찮아요. 반대로 일도 안 하고 계속 놀기만 하면 회사는 그 사람을 해고할 수밖에 없겠죠?”
한수의 말을 들으니 입사 초기에 여기서 노는 것은 눈치 보여서 못 할 것 같았다. 한수는 계속해서 나에게 5층의 공간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내가 제대로 즐기지는 못해도 이런 것들이 있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미심쩍은 회사였지만 오늘은 정말 괜찮은 곳 같았다.
오전 내내 한수는 나에게 회사에서 내가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을 모두 소개했다. 사무실이 있는 곳에서는 조용히 이 부서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이때까지도 나는 내가 어느 부서에서 근무할지 감도 잡지 못했다.
한수는 내가 접근하지 못하는 구역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설명했다. 내 보안 레벨은 A였는데 사무직들이 접근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공간을 다닐 수 있었다. 다음 레벨인 B는 회사의 재무를 다루는 부서들에 해당했다. 그 밖에도 보안 문서를 수시로 확인해야 하는 경우에도 B 레벨이 주어졌다. 다만 이 보안 문서라는 것 중에는 A 레벨이 접근할 수도 있는 것이 있었다. 아마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정보들이지 않을까 싶다. C 레벨은 연구소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으로 우리 같은 사무직들은 그곳에 갈 일이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D 레벨은 회사의 모든 공간에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임원진에게 주어지는 것이었다. 보안 때문에 구분했을 뿐, 내가 A 레벨이라고 해서 아쉬울 것은 없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숙사도 레벨에 따라 구분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내가 있는 곳은 A 레벨인 직원들만 들어올 수 있었고 B 레벨과 C 레벨은 각각 다른 건물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D 레벨은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기숙사 같은 것은 없었다. 하긴 임원인데 그런 게 필요하겠어?
구내식당도 레벨을 구분하고 있었는데 여러 개의 식당이 있을 뿐만 아니라 각 레벨별로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이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레벨의 직원끼리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금지된 것은 아니었지만 보안을 어길 때는 그에 상응하는 징계가 이루어졌다. 어려운 것은 없었다. 회사 사람들과 업무 이야기를 사적인 자리에서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었다. 이게 얼마나 지켜질지는 모르겠지만….
한수와 점심 식사를 마치고 마침내 나는 내가 일하게 될 부서에 가게 되었다. 내가 가는 곳은 운영팀이었다. 공교롭게도 오전에 선준이 말한 그 부서였다. 그리고 이곳엔 그가 말한 은호라는 사람이 있었다. 은호는 대체 어떤 인물일까?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운영팀에서 일하게 된 정진우라고 합니다. 2006년생이고 나이는 우리 나이로 스물여덟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부서원들에게 인사했다. 그들은 내 인사를 듣고 박수를 쳐줬다.
“그래요. 저야 말로 잘 부탁해요. 제 이름은 김재현이고 이곳의 리더, 즉 팀장을 맡고 있어요. 편하게 재현 님이라고 말씀 주시면 됩니다. 진우 님이 나이를 말했으니 저도 말씀드리면 저는 89년생이에요.”
재현은 나이에 비해 매우 젊어 보였다. 셔츠를 하나 입고 있었는데 운동을 많이 하는지 체격도 좋고 내 손을 쥐는 악력도 굉장했다. 짧은 스포츠머리에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만만한 사람 같지는 않았다.
“또 신입을 보내준 거야? 에이 진짜…. 여하튼 반가워요. 잘 지내봐요.”
조금 껄렁해 보이는 남자가 내 어깨를 치며 말했다. 예리해 보이는 눈매를 가지고 있었는데 몸 곳곳에 ‘까칠함’이 묻어있었다.
“소개는 하셔야죠.”
재현이 낮은 목소리로 남자를 나무랐다. 남자는 한숨을 쉬며 다시 나를 쳐다봤다.
“송은호라고 합니다. 99년생. 90년대 알아요?”
송은호!!! 오전에 나온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다.
‘나이스 하신 것 같은데요?’
‘나이스 하신 것 같은데요?’
‘나이스 하신 것 같은데요?’
‘나이스 하신 것 같은데요?’
아까 가은의 말이 머릿속을 계속 스쳐갔다. 이게 어딜 봐서 나이스 한 사람이란 말인가!!!
“은호 님도 참. 좀 친절하게 말씀해 주세요. 반가워요! 진짜 어려 보인다. 아니 정말 어리지. 제 이름은 임다연이에요. 01년생이고요. 우리 잘해봐요!”
붉은색 계열로 머리를 염색한 다연은 재현과 은호에 비해 쾌활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수수하면서도 은근히 포인트를 준 코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매사에 자신감이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추정되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이윤서예요. 1년 전에 입사했고 나이는 08년생. 올해로 스물여섯이에요.”
화장기가 거의 없는 윤서는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머리는 위로 묶고 있었는데 모든 것이 귀찮은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입을 여니 굉장히 친절했고 어린 티가 나는 말투였다.
“내가 마지막이죠? 저는 조건우예요. 2005년생이니깐, 제가 형이네요. 형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농담이고, 잘 지내봐요!”
익살스러운 표정의 건우는 장난기가 많아 보였다. 하지만 어딘가 모르게 뒤끝이 있어 보였다. 그의 장난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여기에 잠시 휴가 중인 민아영이라는 분도 계세요. 다음 주에 복귀할 예정이니, 그때 인사해요. 나이는…. 아마 03년생이었지?”
재현은 건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건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들었다. 재현은 익숙한 듯 건우를 무시하고 나를 다시 쳐다봤다.
“아무튼 여기 온 것 환영하고요. 다음 주에 아영 님 돌아오시면 회식이나 해요. 진우 님도 기숙사 사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그래요. 일단 오늘은 건우 님이 진우 님 돌봐줄까요? 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옆에서 붙어서 챙겨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팀장님!”
건우는 재현을 향해 경례를 하며 말했다. 이번에도 재현은 그런 건우를 무시했다.
“자, 그럼. 진우 님 자리는 제 옆이에요. 이리로 오세요. 컴퓨터 세팅부터 해볼까요?”
건우는 나에게 하나하나 알려주면서 빠르게 세팅을 할 수 있게 도와줬다. 건우는 나에게 2시간 정도는 컴퓨터를 만지면서 업무 툴에 익숙해지라고 했다. 나는 오후 시간 내내 컴퓨터와 업무 툴, 그리고 회사의 기본 자료를 보며 내가 앞으로 해야 하는 업무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봐도 대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알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운영이라는 것이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곁눈질로 건우가 무슨 일을 하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건우는 업무에 너무 집중하고 있었고 나는 그를 방해할 수가 없었다.
“진우 님. 이제 업무 조금씩 해볼까요?”
자신의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했는지 건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네! 무슨 일을 할까요?”
“그럼 따라와요.”
자리에 앉아서 무엇을 할까 했는데 예상외로 건우는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갔다. 그가 안내한 곳은 자료실이라 쓰여있는 방이었다. 방은 전등도 없었고 오직 컴퓨터 모니터에서 나오는 빛에 의지해야 했다. 방은 굉장히 비좁았다. 발을 조금 옮기니 발 밑에 무언가 밟혔다. 바닥에 있는 것을 주워 모니터 앞에서 확인했다. 무슨 기계 파편 같은 것이 보였다.
“여긴…. 뭐죠?”
“진우 님 업무 중 하나예요. 파쇄 알죠? 여기 있는 문서랑 하드를 파쇄만 하면 되는 아주 간단한 업무예요.”
“네? 파쇄요?”
나는 너무 황당했다. 복사기 심부름은 들어봤어도 문서 파쇄를 하라는 것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네 파쇄요. 제가 시범 보여드릴게요. 여기 있는 하드를 하나 집어서 이렇게…. 넣으면 간단하게 하드가 박살 나요. 이걸 하시면 되는 거예요. 문서 파쇄야 뭐 같은 원리로 하면 되는 것이고요.”
“어…. 네…..”
“좀 황당하죠? 대학교까지 나와서 뭐 이런 걸 하나 싶을 거야. 저도 그랬어요. 데이터를 지우기도 하고 이렇게 하드를 망가뜨리기도 하고. 그런데 이것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예요. 이것만 하는 것도 아니고 업무 중 하나니깐 너무 아쉬워하지 말고. 아 그리고 데이터는 보려고 하지 마요. 한 번 보안팀에서 정리한 파일이긴 해도, 여긴 보안이 중요한 곳이니깐. 아무튼 믿고 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나와서 소리치던가 저한테 와서 조용히 말하던가.. 하하 알겠죠?”
이야기를 마친 건우는 방 문을 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방에 홀로 남겨진 나는 여전히 황당했다. 이게 대체 뭐지?
5분 정도 멍하니 있다가 이것도 내 업무라고 생각하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드와 문서만 파쇄하면 되는 것이라 어려운 것은 없었다. 먼저 하드부터 파쇄했다. 생각보다 많은 하드가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은 거지? 이걸 정기적인 업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면 매일 이렇게 하드가 나온단 말인가? 이걸 대체 뭐하러?
작업이 단순하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지나자 모든 하드를 다 파쇄했다. 다음으로는 문서였다. 문서는 더 어려울 것이 없었다. 내용을 보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문서의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확인했다. 하지만 볼 것이 없었다. 대부분의 정보가 검은색 띠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이름이었다. 사람의 이름. 이미 보안팀에 의해 한 번 가공된 정보였다. 자세히 보니 이력서 같았다. 내가 이력서를 제출했던 양식과 똑같았다. 이력서라 생각하니 더 황당했다. 이력서를 대체 왜 내가 파쇄하는 것이지? 이건 인사팀에서 알아서 처리하면 되는 것 아닌가?
생각을 해도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는 기계적으로 문서를 치웠다. 하드에 비해 문서는 너무 많았다. 생각해보니 당연했다. 하드에 있는 정보를 다 인쇄한 것이라면 내가 치운 하드에 비해 오히려 문서 양은 적은 편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정리하고 있을 때 나는 우연히 다시 문서를 보고 말았다. 평범한 이름이었다면 지나쳤을 테지만 나는 그 이름을 보자마자 잠시 굳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름 위에는 여태까지의 문서에는 없던 어떤 글자가 쓰여있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검은색 띠가 있었기 때문에 아마 보안팀에서 놓친 것인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 그 문서에 쓰여있는 글자 자체가 너무 충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문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신규민…. 사망처리]
내가 오기 전 퇴사를 했다는 것으로 알려진 그 신규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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