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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공간 Jul 22. 2019

캐나다는 인생을 도전이라고 했다

제주도에 내 식당 창업하기 Ep. 2







모든 것이 좋았다. 이름도 생소한 핼리팩스라는 캐나다의 소도시에서 외국인에게 둘러싸인 낯선 느낌도. 마침 진행된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것도. 늘 파티를 열어주며 친절하게 대해준 홈스테이의 주인 어사(Eartha)도. 하지만 서울에서의 삶이 환상과 달랐듯, 캐나다의 삶도 신기루처럼 부서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조급해졌다. 영어실력은 더디게 늘었다. 아무에게라도 말을 걸어서 회화 실력을 늘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산책을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말을 걸지 못했다. 생각보다 말을 건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고, 나는 그만큼의 용기가 없었다.


3개월이 지났을까. 한 손에 Grammar in Use를 들고 산책을 하다가 도착한 곳은 지역의 대학이었다. 문득 수업을 받는 학생들을 보면서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건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영어실력이 유창해진다 한들 이방인이라는 사실이 달라질까? 아니 그런데 영어가 늘긴 늘었나?


운명은 꼭 이럴 때 우연을 가장해 문을 두드린다. 약간의 객기로 말을 걸었던 외국인 남자가 마침 그 지역의 파머스 마켓을 담당하는 ‘존’이었던 것을 보면 말이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파머스마켓이 꽤 있지만, 그 당시엔 정말 낯선 문화였다. 농부들이 직접 생산하고 가공한 농·특산품을 판매하는 '파머스마켓'은 먹거리와 볼거리가 가득해 인기있는 관광명소이기도 했다.





파머스마켓 (출처 : 구글 이미지검색)


“파머스마켓에서 내 요리를 팔아볼까?” 당연하게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캐나다의 농산물로 만든 한국인의 요리라니! 어떤 요리를 해야 잘 팔 수 있을까? 판매하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다보면 영어도 많이 늘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안 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 당장 하고 싶어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런데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라니! 파머스마켓에서 판매를 하려면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당연히 어학연수중인 외국인 학생은 자격미달!


결국 파머스마켓의 셀러로 거듭나는 것에는 실패 했지만 생각지 못한 인연이 생겼다. 존은 주말이 되면 날 불러 밥을 먹고 드라이브를 다녔다. 미라클이란 수업에도 데려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종의 종교모임이었던 것도 같다. 모두가 캐나다인이었고, 나 혼자 한국인이었다.  그 또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언어가 늘면서 추억도 늘었다. 홈스테이의 호스트였던 어사는 가나 출신의 흑인으로 핼리팩스의 교장선생님까지 된 엘리트면서 우리가 ‘마미’라고 부를 정도로 다정한 사람이었다. 인종차별을 당한 이야기를 하면 ‘그 녀석을 혼내주겠다.’며 나 보다 더 흥분했다. 몬트리올로 가족여행을 가게 될 때 내게 함께 하자는 제안도 해주었다. 다시 생각해도 모든 것이 감사한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럴 때마다 한국에 있는 진짜 내 가족들 생각이 났다. 캐나다 생활은 행복했지만 늘 외로웠고 가족이 그리웠다. 겨우 1년뿐인데, 가족을 못만나는 슬픔이 이렇게 클 줄 몰랐다. 무언가 모를 쓸쓸함과 외로움이 몰려올 때면 잠을 청하기도 어려웠다. 그 때 마다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꺼내보았다. 나는 중년의 남성이 평생 다닌 회사를 퇴직하고 처음 무직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을 때, 캐나다를 가겠다고 선언한 철없는 막내아들이었다. 나의 생활비는 아버지의 노후자금이기도 했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편지에는 ‘하고 싶은게 있으면 해야지.’라고 쓰여 있었다.







가족이 그리울 때면 한국음식이 생각났다. 그럴때마다 아이러니하게도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스타벅스와 웬디스버거에서 느껴지는 전세계 공통의 맛은 한국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다가 한인마트를 찾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한국인 친구도 생겼다. 요리를 배웠다는 것이 이렇게 다행스러울 줄이야. 제육볶음이라도 만들어주는 날엔 모두가 열광했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때의 나는 사람이 그리웠던 것 같다.


그 때 효진을 만났다. 효진은 어학원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듣는 한국인 학생이었다. 어학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야 해서 늘 페리를 타곤 했는데, 그 페리에 효진이가 있었다. 어색한 인사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덧 서로의 일상을 공유할 정도의 친분이 쌓였다. 어느 날 룸메이트가 생겼다며 일본에서 온 유카리를 소개해줬는데, 그때는 정말 우리가 그렇게나 가까워질 줄 생각지 못했다.


유카리는 워킹비자로 캐나다에 방문해 일자리를 찾고 있었고, 우리는 늘 일자리를 함께 찾아보기도 하고 이야기도 하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요리를 좋아하는 유리는 종종 어머니의 레시피라며 특별한 음식을 선보였는데, 그렇게 처음 맛본 그라탕과 레몬치즈케이크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만들어주는 요리의 따뜻함이라니. 늘 친구들 사이에서 요리를 하는 입장이었던 내게는 낯설지만 뭉클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계기가 무엇이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사소한 시간들이 쌓여 소중한 친구가 되었다.







핼리팩스에 있는 대부분의 집에는 뒷마당이 있었고, 우리는 늘 바비큐를 했다. 농담처럼 우리가 핼리팩스의 장작을 다 없앤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는 자주 만났고 서로를 응원했다. 노을이 지는 하늘, ‘타닥타닥’ 장작타는 소리, 깜깜해지는 마당 안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그릴 속 불꽃,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불안함을 공유하며 서로를 북돋아 주었던 대화들. 이런 것이 삶이 아닐까? 싶은 하루하루를 보내며 그렇게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갔다.


효진이가 가장 먼저 핼리팩스를 떠나게 됐을 때 외로움을 많이 타는 유카리는 정말 힘들어했다. 그런 유카리를 위해 새로운 룸메이트를 구해준 것도 효진이었고, 룸메이트가 올 때까지 비는 시간동안 유카리와 함께 있어달라는 부탁을 한 것도 효진이였다. 지금 생각해도 아무리 친구지만 남녀가 한 집에서 있는다는 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싶다. 그런데 그 때는 힘들어하는 유리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만 했다. 정말 가족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진심을 알기에 일본에 있는 유리의 남자친구도 우리의 사이를 이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이제 내가 떠날 차례가 되었다. 어사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을 때, 어사는 처음 나를 만났을 때처럼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녀의 손에는 캐나다 로고와 함께 2011이라는 숫자가 적힌 티셔츠가 들려있었다. “2011년을 잊지 마(Please don't forget what you do in 2011)”라는 말과 함께 선물 받은 그 옷은 여전히 옷장에서 그 때의 추억을 상기시킨다.


어학원을 함께 다녔던 친구들은 밤을 새워 추억을 나누고도 아쉬워 공항까지 배웅해주었다. 한국의 가족을 만나러 가면서 캐나다의 가족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캐나다의 삶이 주는 교훈일까. 반가움과 아쉬움이 진하게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의 삶에 적응하고 있을 때 유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결혼식에 초대한 것이다. 초대해준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는데, 나와 미희를 위해 영어가 가능한 서버를 고용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결혼식의 2부가 시작되었을 때, 유리는 나와 미희를 양쪽에 세워두고 입장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함께 하고 싶었다고 말해주는 데 뭔가 가슴 속에서 찡한 기분이 들었다. 과연 캐나다를 다녀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역시 인생은 도전하고 볼 일이라는 것 역시 캐나다의 삶이 주는 교훈이다.








 제주도에 내 식당 창업하기 


프롤로그

그 동안 내 인생에 이렇게 열정적인 순간이 있었던가?

1부 목차

ep. 1화 서울! 서울! 서울?

ep. 2화 캐나다는 인생을 도전이라고 했다 <현재글>

 ep. 3화 길이 하나라면 길을 잃어버릴 일은 없을 것이다

ep. 4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시작하면 되니까

ep. 5화 길을 떠나면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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