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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정한 여유 May 29. 2024

이 오이가 네 오이냐?

“이 오이가 네 오이냐?”

“제 오이가 아니옵니다. “

“이렇게 정직하다니. 모든 오이를 너에게 주노라.”

산신령님이 상으로 오이를 몽땅 주신 것 같다. 이만큼 오이를 받은 게 불과 열흘쯤 전이었던 거 같은데, 다시 그만큼의 오이가 우리 집에 왔다. 어머님은 시댁 근처 어디에 오이가 샘솟는 밭을 가지고 계신 걸까? 실은 지난번 오이는 누구를 주고도 반 이상 버린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받아오는데 ‘버리지 말고 먹으라’ 시는 말씀에 혹시라도 지나가다 보신 건 아니겠지, 말도 안 되는 의심을 해본다. 우리 집에 오이귀신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오이를 나 혼자 다 먹어야 하는가, 고민에 빠진다. 냉장고에 두니 금방 마르던데 어서 당장 눈앞에서 해치우고 싶다. 떠오른 욕망에 사로잡힌다. 집에서 그나마 인기 있었던 오이메뉴는 오이소박이였다. 마트에서 오이소박이 양념을 발견하고 신나서 집어 왔다. 내용물이 대부분 국산인 것이 아주 마음에 든다. 지난번에 산 겉절이 양념은 집에 와서 보니 대부분 중국산 재료였다. 식당에서 줄기차게 먹는 게 중국산 김치인데 집에서까지 정성스럽게 중국산 김치를 담가 먹고 싶지 않아서 그 이후로는 시판 양념을 잘 보지 않았다. 비슷한 사람이 많았던지 이 양념은 집에 있는 고춧가루를 넣어서 만들란다. 들어가는 재료에 부추가 있었지만 방금 장을 보고 막 집에 도착했는데 다시 가기에 번거롭다. 부추 안 넣으면 되지! 내 마음대로 과감하게 제친다. 오이를 썰고 시판 양념 넣고 고춧가루 넣고 버무리니 오이소박이 완성이다. 와우, 3분 만에 완성이다! 맛을 보니 꽤 괜찮다. 저녁 반찬으로 내놓은 오이소박이 한 접시가 완판되고 리필이 요청되니 이보다 뿌듯할 수가 없다.

엄마와 아내 역할이 이골이 날 때가 있다. 짧은 경력에도 엄살을 피운다. 그런 날엔 화가 나고 심술이 난다. 이내 시무룩해지고 침울해진다. 내 인생은 그렇다 치고 내가 남편과 아이 인생까지 훼방을 놓는 사람은 아닐지 머릿속이 온통 까매진다. 그런데 오이소박이가 뭐라고 살림꾼이 된 듯한 기분이다. 별것 아닌 것에 또 신나서 검색을 또 한다. 이번에는 김가연오이탕탕이다. 편스토랑에 나온 레시피라고 하니 이것도 검증이 이미 됐을 것이다. 양념도 아주 간단하다. 식초, 마늘, 설탕, 통깨. 모두 집에 있는 재료라 당장 할 수 있다. 칼을 든 김에 무도 썰고 배추도 썰고 다 썰어 버리자.

오이를 적당한 크기로 썰고 봉투에 넣고 두드린다. 스트레스를 다 풀겠다는 마음으로 마구 두드린다. 원래는 그냥 통째로 넣고 두드리라고 나오는데 그럼 안 잘린 걸 다시 잘라야 한단다. 이편이 깔끔할 것 같아 이것도 마음대로 바꿨다. 흠씬 패준 오이를 꺼내서 분량의 양념을 넣으면 끝이다.

이런 초간단 레시피가 있나. 새콤달콤 입맛을 돋운다. 통깨를 갈아서 넣는 거라 고소함은 덤이다. 매운 잔치국수를 비벼 얹어 먹고 싶은 맛이다. 밥맛이 없고 더워서 기운이 쪽쪽 빠지는 여름에 수분 보충도 되고 좋은 반찬이 될 것 같다. 살림꾼 내공이 살짝 더 단단해졌다.




이번 독서모임 책은 로맹가리의 새벽의 약속이었다. 로맹 가리의 업적은 그가 원한 것일까, 어머니의 꿈일까. 아이가 태어난 그대로를 존중하며 키우고 싶다. 내가 원하는 대로 고쳐 키우고 싶지 않다. 불쑥불쑥 나의 욕심은 아이를 고치려 든다. 내가 아이를 바꾸고 싶듯 아이 역시 나를 바꾸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실수하고 화내는 나를 바꾸고 싶은 것은 나이지, 아이가 아니다.


살면서 나와 맞지 않는 여러 사람을 마주친다. 나 혼자 살더라도 외출이라도 하면 나와 다른 타인을 하루에도 수십 명 마주치게 된다. ‘사람은 고쳐 쓰지 않는다.’라는 말을 종종 떠올릴 때가 있다. 오랜 시간 마주쳤던 누군가를 떠올린다. 가장 오랜 기억 속의 그 사람과 가장 최근의 그를 떠올린다. 바뀐 부분을 중점적으로 떠올려본다. 뭔가를 빠뜨렸던 그와 아직도 매번 뭔가를 잊어서 허둥대는 그. 성격이 급해서 하는 일들 대부분을 대충 하고 넘어가는 그와 무엇 하나 집요하게 할 줄 모르는 과거의 그. 둘을 겹치면 대충 데칼코마니 그 언저리가 될 것 같다. 내가 떠올린 그는 다름 아닌 나다. 마음에 안 드는 점도 많을 테고 고치고 싶은 점도 많다. 그런데 그런 부분이 얼마나 많이 고쳐졌나 생각해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아침에 못 일어나서 학창 시절 나를 깨우느라 늘 애를 먹었던 엄마와 주말에 깨우면 대답하고 또 자는 나를 보는 남편. 둘이 보는 나는 비슷할 것이다. 나도 바뀌기 쉽지 않은데 남이 바뀌길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이다. 알면서 불평하고 실망하는 것은 일말의 기대가 남아있어서일까. ‘ 저 사람은 그냥 저렇게 평생 살라지.’ 누군가를 고쳐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나와 다른 상대를 포기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임을 알지만 다른 길로 가고 싶다. ‘저 사람은 저게 타고난 성격이야. 나 역시 바뀌지 않는 상태로 살고 있잖아. 각자를 인정하자.’ 포기보다는 인정하고 싶다. 그편이 나를 위해 좋다. 깨끗이 포기하지 않으면 어느샌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대를 느꼈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 나는 또 초간단 레시피만 찾고 있다. 이번에는 요즘 화제인 최화정의 오이김밥이다. 다이어트까지 된다니 일석이조다. 마침, 집에 남아도는 초밥키트 속 단촛물도 있다. 김밥을 진짜 좋아하는데 진짜 못 만다. 재료가 하나뿐이니 좀 나으려나 싶었는데 역시다. 김밥을 나는 여전히 못 싼다. 위에 쌈장과 스리라차 소스를 찍어 먹으니 아주 맛있다. 오이를 통째로 먹어야하니 최대한 얇게 써는 것이 먹기 편하다. 간편하고 몸에도 좋다니 몇 번 더 해 먹어볼까 싶다. 그러다 보면 김밥 싸는 기술도 나아질지 모른다. 고칠 수는 없어도 나아지는 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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