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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Park Apr 28. 2020

즐거움도 잠시, 이제 어떻게 살지?

좌충우돌 캐나다 영주권과 취업 도전기


한국에 도착해서 할 일이 참 많았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친척, 친구들과의 만남은 최소화하기로 하고 나는 1년이 넘게 주방에서 일하느라 아팠던 무릎 중 왼쪽 무릎에 박힌 금속 핀을 제거 하기 위하여 수술을 집도하신 의사 선생님과 귀국한 지 사흘 만에 만났다. 예약을 미리 캐나다에서부터 했기에 유명한 원장 선생님이지만 빨리 만나 뵙고 수술 관련하여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수술할 때에도 원장 선생님으로부터 수술을 받았지만 초등학교 내 짝이 부산대학병원의 의사로 일하고 있었기에 소개를 받아 이 선생님과 쉽게 연결이 되어 수술이 가능했고, 나중에 알고 보니 TV에도 출연하시고 부산에서는 손꼽히는 정형외과 의사이셨다.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을 직접 진찰도 하시고 상담도 하시는 분이셔서 더더욱 안심이 되는 분이었다.



핀 제거 수술은 10월 3일에 하기로 확정하였다. 시차 적응이 끝날 때 쯤 입원하여 다시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것이다. 수술 날짜도 금방 다가왔고 나는 다시 수술 방으로 향하는 침대에 누웠다.


무릎 절골술을 처음 수술할 때가 가장 힘들었었다. 뼈를 절단하여 각도를 휜 후 인공뼈를 채워주고 재활하여 퇴원하는 시간까지 거의 4개월 정도가 소요되었었는데, 핀 제거 수술은 일주일만 입원하면 된다기에 너무 좋았다.


재활도 힘들었지만 가장 싫은 건 척추 쪽에 맞는 하체 마비 마취 주사이다. 물론 잠시 맞고 나면 하체에 힘이 하나도 없고 감각도 없는데 난 그 시간이 참 싫었다. 물론 나중에 마취가 깨면 하반 신에 감각이 돌아오지만 주사를 맞고 하반신 마비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제발 수술 후 마취가 빨리 깨기를 기도하였다. 수술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끝났고, 수술은 잘 되었다고 하신다....



병실에 누워 수술이 잘 되었다는 소식을 느끼는 것도 잠시, 이제 어서 빨리 회복하여 캐나다에서 먹고 살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마음은 서서히 조급해지기 시작하였다. 뭐, 힘들게 영주권도 땄겠다 주위에서는 푹 쉬고 가서 천천히 준비하라고 하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


그냥 숨만 쉬고 있어도 관리비, 애들 학원비, 식비, 생활비가 적지 않게 나가는데 가장으로서 병원에 누워 있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수술 회복 후 캐나다로 돌아가면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정해진 것도 아니고 가서 뭐하고 살지, 어떻게 돈을 벌어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눈만 뜨면 몰려왔다.


집 사람은 캐나다에 가서 제대로 된 직장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가족들 다 같이 캐나다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겠냐? 고 말한다. 물론 그 말도 맞다. 수입많지는 않지만 아내는 장애 청소년을 상대로 뮤직 테라피를 하는 교사로 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이산가족이 되고 싶지 않았고 세 아들은 아빠의 부재로 인하여 집 안의 분위기도 그리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애들은 캐나다 가면 공부로부터 해방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살았나 보다. 이제 아빠가 영주권을 가지고 왔으니 자신들도 캐나다 가면 실컷 놀고 자유롭게 살았으면 했나 보다.





한국으로 오기 전에 캐나다에 있을 때 구직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레스토랑 주방에 일하면서도 원래 전산 프로그래머로 취직을 해보려고 www.indeed.com 이라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구직, 구인 사이트에 5월부터 영문 이력서를 올려놓고 기다려 봤지만 연락 오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고 간혹 미국에 있는 헤드헌팅 회사에서 연락은 두 통 정도 받았으나 끝내 어떤 기업과도 연결되지 않았다.


주위에서도 캐나다에서 취업을 하기 위해서는 캐나다 내에서의 경력이 중요하다고 했지만 내가 일했던 IT 분야와 관련된 업체라면 그래도 취업이 어렵지 않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캘거리에 있는 구인, 구직 알선 정부기관, 카톨릭 단체 등을 노크하여 알아본 결과, 그냥 지금 하는 조리사 직으로 직장을 구하는 것이 훨씬 빠르게 진행될 것이라는 것이 대다수 의견이었다. 그렇지만, 하루 종일 서서 일해야 하는 주방 일을 내가 다시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많았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IT회사는 은행 ATM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나는 캐나다 내에서도 해당 분야 업체들 위주로 이력서를 제출해 보았다. 대략 6군데 정도의 회사를 추려 프로그래머 잡이 아니더라도 지원을 해 보았다. 비 프로그래밍 Job은 FIELD SERVICE TECHNICIAN 같은 포지션도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 되었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겠다는 마음으로 야심 차게 지원을 해 보았으나 아쉽게도 연락이 오는 회사는 한 군데도 없었다.




하루는 이메일 수신함에 낯선 이메일이 들어와 있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열어 보았는데

"취업에 관심이 있느냐?" 라는 서두와 함께 SASKATOON에 있는 MERRIOT HOTEL의 인사 담당이 연락이 왔었다. 이름을 가만히 보니 중국계 여자분인 것 같았다. 이제와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전에 전산직과 함께 다른 이메일로는 조리사 직도 구직란에 올려놓은 기억이 있었다. indeed.com은 이메일을 계정으로 사용하는데 전산직, 조리사직 2개의 직종을 한개의 ID로 올리면 인사담당이 보면 의아해 할 것 같아서, 2개의 계정으로 나누어 다른 영문 이력서를 올렸었다. 캐나다는 조리사 직종이 힘든 직업이라 구직자보다 구인자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어렵사리 받은 구인 연락이었지만 나는 정중히 지금은 이직이 불가하니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이메일을 보냈고 혹시 나중에 정말로 직장을 못 구하면 여기라도 연락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일단 접었다. 캔모어 주위에 요양원 조리사로 일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랑 가끔 식사를 하면서 조리사 취업 정보를 모았었고, 호텔이나 일반 레스토랑보다는 요양원 주방에서 일하는 것이 훨 수월하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나보다 나이가 12살이나 적었고 아직 젊었기에 체력도 받쳐주고 무릎도 아프지 않기에 나보다는 조건이 훨씬 나아 보였다. 요양원에 아침 6시 출근하여 아침, 점심 준비를 마치면 오후 2시 반에 집으로 돌아온단다. 그 후에 오후 4시까지 투잡을 뛰기 위하여 Banff Gondola Snack Bar로 다시 2차 출근을 하였다. 거기서 약 4시간 근무 후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 8시가 된단다. 요양원은 시급을 일반 레스토랑보다는 많이 주지만 팁이 없기 때문에 실제 받는 급여는 작았다. 캐나다는 이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물론 Low Income 가정을 인정받으면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지지만 부부가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먹고 살기가 쉽지 않은 곳이 캐나다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취업 목표는 시급을 2배 가까이 받을 수 있는 프로그래머로 일할 직장이었다. 나는 C++ 프로그래밍 언어 세대로 요즘같이 Java, Python, Mobile App 같은 Skill과 경력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구인 사이트에 가 보면 대부분의 구인 광고가 자바, 모바일 관련 직종이었고 C++ 언어 프로그래머를 원하는 직장은 그리 많지 않았다.


캔모어에 일할 때에 매주 캘거리를 다녀왔었는데 캘거리는 한인 수가 약 1만 명 정도 되는 도시지만 전산직으로 일하는 분들은 그리 많이 않았다. 그래도 같은 직종의 엔지니어끼리 만나는 욕구가 있었는지 한 분이 Facebook을 통해 한인 IT 모임을 만들었다. 나는 FACEBOOK 활동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하루는 Facebook을 보다가 이 클럽에 무작정 가입을 하게 되었다. 멤버 중 항공 관련 회사에 근무하는 멤버가 있었는데 한국에서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캐나다로 이민 온 친구가 있었다. 얼굴은 모르나 Facebook에 자기 회사에서 C, C++ 프로그래머를 뽑는다는 소식을 올렸었고 나는 그 소식을 보자마자 그 친구에서 내 소개와 일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었다. 얼굴도 대면해 보지 않은 관계였지만 그 친구는 성실히 답변해 주고 매니저에게 일단 얘기해 보겠다는 긍정적인 답을 주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https://www.facebook.com/groups/995633763974840/


2019년 3월에 첫 모임을 가졌고 그 친구와의 첫 대면을 하기 위하여 레스토랑 업무가 힘들었지만 하루 시간을 내어 참석을 하였다. 모두들 모르는 얼굴들이지만 IT를 하는 사람들이기에 조금만 얘기를 해도 친해졌다. 내 나이가 50을 넘었으니 당연히 그 모임에 온 10명이 넘는 회원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ㅠㅠ


 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 제외하고 모두 IT 회사에 근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참으로 부러웠고 어떻게 하든지 그들로부터 정보를 들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묻고 머릿속으로 정보를 열심히 입력하고 있었다.


첫 모임 후 다음을 기약하면서 다들 헤어졌고 나는 구인 소식을 올린 친구랑 매주 화요일 만나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신념으로 많은 질문과 내 PR을 적극적으로 하였고, 회사에서도 사람이 필요하니 매니저에게 내 이력서를 전달하겠다고 하였다. 나는 그 친구와 만남을 가지고 다시 캔모어로 돌아와 희망을 가지고 나날을 보내게 되었고 나의 이력서가 매니저에게 잘 전달되고 면접 기회가 주어지기를 하나님께도 간절히 기도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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