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에 힘이 생기는 순간

영화 '매트릭스' 감상 에세이

by 호원샘
나는 생각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지상에는 길이 없었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 루쉰, '고향'에서 -


워쇼스키 자매, '매트릭스'(1999) 중 명장면. 영화는 몰라도 이 장면은 누구나 알았었다.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에서 인간의 정신과 컴퓨터 프로그램은 공존한다. 프로그램은 의인화되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수행한다. 매트릭스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이 가상현실에 있는지조차 모른 채 살아간다. 고도로 발달한 기계들이 인간을 용이하게 재배하기 위해 인간의 의식을 매트릭스에 상주하도록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육체는 배양실에 수면 상태로 꿈을 꾼다. 그 꿈이 매트릭스인 것.


영화의 서사는 매트릭스의 실체를 인식하고 깨어난 인간들이 기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AI의 발전이 고도화되어 가는 요즘, 우리에게 화두를 던진다. 아래는 '라마'라는 프로그램이 자신의 딸 사티를 지키기 위해 현실과 매트릭스의 중간지점에 들어선 이야기를 주인공 네오에게 들려주고 있다. 그 이야기가 자못 아름답다.


워쇼스키 자매, '매트릭스 3'(2003)

Rama: I love my daughter very much. I find her to be the most beautiful thing I've ever seen. (...) Every program that is created must have a purpose. If it does not, it is deleted. I went to the Frenchman to save my daughter.

라마: 저는 저의 딸을 몹시 사랑해요. 제가 봐왔던 모든 것 중에서 제 딸이 제일 아름답다는 걸 알았습니다. (...) 그러나 창조된 모든 프로그램은 목적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삭제됩니다. 제 딸을 구하기 위해 저는 '프랑스인'에게 갔습니다. (즉 '프랑스인'과의 모종의 거래를 통해 중간 영역에 도달한 것)


Rama: You do not understand.

라마: 저를 이해 못 하시는군요.

Neo: I just have never..

네오: 저는 그저..

Rama: heard a program speak of 'love'.

라마: 프로그램이 사랑을 말한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는 거죠.

Neo: It is a human emotion.

네오: 인간의 감정이잖습니까.

Rama: No, it is a word. What matters is the connection the word implies

라마: 아닙니다. 그것은 '말'이에요. 중요한 것은 그 말이 내포하는 연결점입니다.


말은 관념을 담는다. 그리고 세상을 담는다. 말은 정신과 연관되어 있다. 그렇기에 인간은 정신없이 살 수 없다. 예수는 자신을 시험하는 마귀에게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산다 했다.(마 4:4) 선조들은 혼백魂魄을 같이 썼다. 혼비백산 魂飛魄散. 혼은 날아가며, 백(몸)은 흩어 없어진다.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다.


라마는 컴퓨터 언어로 설계된 프로그램일 뿐이지만, 말의 힘을 알았다. 네오가 사랑은 감정이라 여겼던 일에 대하여 라마는 '말'이라고 답했다. 실체가 있는 것이다. 정신은 육肉 없이 바로 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만으로는 안 된다. 말이 암시하는 연결점을 붙들어야 한다. 즉 말이 향하는 곳으로 몸도 움직여야 한다. 라마는 네오에게 '그 연결점을 붙들고 있기 위해 무엇을 줄 수 있냐'라고 묻자, 네오는 "어떤 것이든 Anything"이라고 답했다. 라마 자신은 딸을 지키기 위해 규칙을 어기고 위험을 감수했다.


말이 앞선다고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루어졌던 모든 일에 앞선 것은 '언어'였다. 희망, 사랑, 평화. 이런 소중한 가치들은 인간의 고고한 감정이 상像을 갖춘 최소의 모습이다. 이 소리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랑과 희망이 무엇인지 느끼고 행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각자의 마음속에 움트는 아름다운 씨앗이 말씨로 싹트길 희망한다. 루쉰의 말대로 길이 있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걸음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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