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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잔 Oct 24. 2021

믿고 기다려주는 좋은 어른을 만난다는 것

<올리버 트위스트> 혜정의 편지

나의 동지 라나와 성호에게 나도 다짐을 하는 오늘이야!

     

  하이, 자매들!! 지금은 일요일 저녁 8시 13분, 드디어 내가 밀린 숙제를 시작할 마음의 준비가 됐다. 그대들은 뭘 하고 있을까. 홀가분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주를 준비하고 있을까. 주말 내내 학원에서 아이들과 책 읽고 토론했던 성호는 지금부터 수요일까지 찌~인하게 놀 궁리를 하고 있을 거고, 가족들에게 충실한 우리 라나는.... 이제 겨우 육아와 살림에서 퇴근하고 나처럼 컴퓨터 앞에 앉았을 것 같은데 이런!! 불과 3분 전에 “일단 초고 완성~”이라는 메시지를 날렸다. 아,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마감에 쫓기게 되다니.. 흑.   

  

  오늘 내가 이야기할 책은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야. <데미안> 이후 화요일의 북런치에서 두 번째로 만난 고전이었지.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었지만, 두 독서 대가들도 못해낸 완독을 했다는 사실에 얼마나 뿌듯하던지. 그대들 아니었다면 세상 떠날 때까지 이 책을 스스로 집어 들지 않았을 거야. 홈쇼핑에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을 판매한다며 가슴 설레어하는 이 만년 문학소녀들을 그래서 사랑한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독후감은 너무나도 힘겨운 숙제야. 2주라는 넉넉한 시간이 있었음에도 끝내 마감을 목전에 두고서야 마음이 급해졌다오. 그렇다고 그 2주 동안 까맣게 잊은 건 아니야. 늘 머릿속 어딘가에서 황색 신호등처럼 점멸하고 있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고민만 길었지.     


  요 며칠 전에는 1883년에 발표한 작품이라는 것에, 주인공 올리버 트위스트가 9살 소년이라는 설정에 “1883년 9살인 올리버에게 100년 후 8살인 혜정이가”로 시작하기도 했어. 하지만... 현실의 난 1983년의 나로 빙의되어 써내려 갈 수 없더라. 영국의 산업혁명과 공리주의를 배웠고 찰스 디킨스의 생애를 알고 있는, 순수하지 않은 마흔여섯 아짐이기 때문이겠지. 무엇보다 1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누군가는 밑바닥을 살아가고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 거야.      


  꼬꼬마 시절에 읽었던 <올리버 트위스트>는 학급문고 중 한 권이었어. 이야기 속 장면을 재현하는 원색 그림이 페이지마다 삽입돼 있던 세계소년소녀명작전집 말이야. 원작 소설보다 훠~얼씬 얇았지만 올리버의 고단한 하루하루에 함께 울었던 기억, 온갖 고난과 역경 끝에 행복을 얻어 안도했던 기억은 생생해. 악당 페이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점잖고 부유한 노신사의 양아들이 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이모까지 만날 때 나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얼마나 축하해줬는지. 힘든 생활에서도 상냥하고 따뜻한 성품을 잃지 않았던 <소공녀> 세라가 아버지의 친구를 만나 옛 신분을 되찾는 장면처럼 말이야. 부끄럽지만 고백하는데, 책 말미에서는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어. ‘내게도 출생의 비밀이 있지 않을까, 더 좋은 진짜 가족들이 날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엉뚱하지만 어린이 출판사는 정말 대단하지 않니? 이렇게 많은 등장인물과 복잡한 서사로 엮인 긴 사회풍자소설을 간추리고 간추려 어린이책으로 편집해냈으니 말이야. 원작 소설에는 범죄소굴 두목만큼 비열하고 악독한 싸익스와 이 나쁜 남자를 끝내 떠나지 못하는 낸시, 아버지가 남긴 유산에 눈이 먼 배다른 형 멍크스 등 보다 다양한 인물이 등장해. 잭 도킨스라는 소년은 오갈 곳 없는 올리버에게 첫 집과 직장을 마련해줬지만 그야말로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친구고. 먹고살기 힘들다고 모두 범죄자가 되는 건 아닌데 도둑질, 매춘, 폭력, 살인, 배신으로 점철된 이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오늘 9시 뉴스를 보는 것만 같았지.     


  하지만 어두운 뒷골목을 헤매면서도 희망과 선함을 간직했던 올리버는 결국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구원받게 돼. 모두가 올리버를 음해하고 비난해도 올리버를 믿어주고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좋은 어른들 말이야.      

“하지만 선생님, 아, 정말이지, 선생님! 이 연약한 아이가 자발적으로 사회의 가장 흉악한 무리와 한 패가 되었다고 믿으세요? 설령 저 애가 나쁜 아이라고 해도 말이에요. 저 애가 얼마나 어린지 생각해 보세요. 저 애가 엄마의 사랑이나 가정의 행복을 전혀 몰랐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세요. 학대받거나 두드려 맞아서, 또는 굶주림 때문에 나쁜 사람들과 한패가 되어 그들의 강요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숙모님, 다정한 숙모님, 제발 그런 것을 생각해 주세요. 불쌍한 아이가 감옥에 끌려가도록 하시기 전에 말이에요. 감옥에 가면 저 애는 틀림없이 올바르게 될 모든 가능성을 잃어버리고 말 거예요. 아! 절 사랑해 주시는 숙모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숙모님의 친절함과 다정함 속에서 부모님이 안 계신 걸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하지만 숙모님이 안 계셨다면 저 역시 혼자 버려져 이 불쌍한 아이처럼 의지하거나 보호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거예요. 그러니 숙모님, 아이에게 동정을 베풀어 주세요. 너무 늦기 전에 말이에요!”  

착한 데다 예쁘기까지 한 로즈의 입을 통해 찰스 디킨스는 이야기해. 사랑과 행복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아이들, 학대와 폭력과 굶주림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베풀자고. 그래서 우연에 우연이 뒤따르고 출생의 비밀까지 더해지는 막장 드라마여도 100년을 훌쩍 넘어 지금까지 마음을 울리는 명작이 되었나 보다.     

나도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어. 하지만 내 마음속 아이 때문에 쉽지 않아. 혼자서 상처 받고 혼자서 오해하고 혼자서 주눅 드는 아이 말이야. 그래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같이 성장하자고 먼저 손 내밀어 준 그대들이 있어 어제보다 오늘 한 뼘은 큰 거 같아.  


내게 좋은 어른이 되어준 그대들과
오래오래 같이 나이 들기를 꿈꾸며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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