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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끼 Feb 14. 2022

유혹

행동강령

이곳은 몇 안 되는 나의 아지트다. 이색적인 인테리어는 남미의 어느 도시를 생각나게 하고,

찾잔은 유럽 왕실의 고풍스러운 느낌이다.


긴 가죽 코트를 옆좌석에 걸치고, 가슴골이 드러난 베이지색 스웨터를 한번 올리면서 창가에 앉았다.

탁자에 아이패드와 밀라 쿤데라의 책을 디스플레이하고,  한 손에는 커피 향 가득한 따뜻한 커피잔을

 다른 한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몸을 비스듬하게 젖히고 푹신한 의자에 기댄다.

 따스한 실내 공기를 느끼면서 음악소리에  살짝 눈을 감았다.  아직 이른 평일 오전이라 손님이 없었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나오는 샘 스미스의 꿀 떨어지는 목소리가 전신을 기분 좋게 한다.

그때 대각선 테이블 맞은편  혼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던졌다.


짧은 쇼트커트에 귀밑을 깔끔하게 상고머리처럼 세련되게 면도한 정장 차림의 남자가 노트북에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 어린 노무 시키가 잘생겼군,  뭐하는 놈인데 이런 시간에 카페에서 혼자 죽돌이를 하는 거지? 타이핑하는 솜씨를 보니

글 쓰는 일로 먹고사는 사람 같기도 하고,

 화장실은 바로 뒤인데, 왜 내 자리를 빙돌아서  화장실을 가는 건데... 날 한번 보겠다는 너의 속셈 모를 줄 알고..

꼴에 눈은 높아가지고,  아기야 내가 일찍 결혼해서 너보다 조금  어린  딸이 있단다.  그래 내가 좀 심하게 동안이긴 하지....... "


  30대로 보이는 남자는  내가 카페를 들어선 그때부터 노트북과 씨름하면서도  

 나를 힐끔힐끔 보고 있었다.

 내가 누군가!  먼저 카페 안을 메의 눈처럼 사냥하고, 시선을 즐겁게 하는  수컷들 스캔부터 먼저 하지 않았던가!  이 녀석을 놓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 시간에 혼자 있다니......

나는 긴 머리를 한번 쓸어내리고 목덜미가 살짝 드러나게 자세를 바꾸었다.


" 현빈을 쫌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이 맛에 커피 한잔 마시려고 풀메이크업을 하고 동네 카페를 두고 차까지 끌고 와서 이런 곳에서 커피를 마신다.

이런 시선강탈 재미까지 없으면 나의 중년은 무슨 재미로 살까?"


 그가 다시 느릿하게 내 쪽으로 걸어온다.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책을 살짝 보이게 집어 든다.   핸드폰으로는  몇분간격으로  초단타 주식 매매를 하고 있다.


" 샹! 30,000원만 먹고 치고 빠지려는데. 계속 15,000원 언저리만 맴돌고 있다. "

그가 내 테이블을 지나쳐 통화를 하면서  카페 밖으로 나간다.

  추운데 굳이 카페 안에서 통화를 하지 않고, 나가서 통화라는 이유는 뭘까?

귀여운 자식 나가는 와중에도  테이블 위 책에   시선이 머물다 간다. 밀란  쿤데라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일까!"

이럴 때 나의 행동강령이 있다.  절대 의식을 하지 않는 척 하는 것.  시선을 마주치지 않을 것, 그러다가 딱 한번 마지막에 시선을 그 남자에게 오래 한번 지긋이 주면 된다.


그때  이 게임은 끝나는 것이다   이때는 타이밍이 중요한데  아직   원하는 타이밍이 오지 않았다."

남자는 해필 내가 잘 보이는 창밖에서 서서 전화 통화를 했다.

미니 스커트를 입은 다리를 한번 꼬아 그가 보이도록 자세를 바꾸었다.


검은 스타킹 안으로 매끈한 다리가 내가 봐도 매혹적이다.

나는 언제 어디를 가도 남자들의 시선을 한 번쯤은 받는다. 그리고 그걸 즐긴다. 딱 거기까지다.

거리를 걸으면서도 맞은편 남자가 무심히  걸어오는 걸 보면서 주문 같은걸 걸어 보기도 한다.


" 어디 네가 날 안 보고 베기나 보자"

" 역시나 본다.  그래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날 한번 보고 안구정화도 하고, 니 정신건강을 챙기는 건데... 누가 말리니.. 맘껏 봐라 "


시간과 돈과 노력은 은 나의 지적이고 섹시한 외모를 배신하지 않았다.

연예인이 별건가! 이런 타인들의 시선을 먹고사는 것도 나의 즐거움 중 하나이다.

주식체결이 끝났다.  초단타매매로 내가 먹고 떨어지는 금액을 하루에 3만 원이면 족하다.

이렇게 적게 먹고 적게 싸는 전략으로 나는 주식으로 돈을 잃지 않았다.

오늘 하루 비싼 레스토랑에서 하루 차값은 번 셈이다.

남자가 카페로 들어서더니 카운터로 갔다. 커피 주문을 다시 하는 것 같았다.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다소곳이 모았다.


그리고 책을 집어 들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 책은 늘 카페에서  읽었다.

그냥 아무 페이지나 펼쳐도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문구들이 많다.  몇 페이지 읽지도 않았는데,

시간을 보니 11시 반이다.

벌써 한 시간 반이 지나 있었다. 이제 슬슬 일어날 시간이다. 남자를 힐끗 보았다.  

그는 여전히 집중해서 노트북에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 한 번도 남자와 한 번도  시선이 마주치지  않았다.

태블릿과 핸드폰 그리고 책을 챙겼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우아하게 일어났다.

삐거덕 거리는 의자 빼는 소리와 함께 그가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그의 시선을 뒤로 느끼면서 걸었다.

그는 아쉬움 가득한 시선으로 나의 뒷모습을 맘껏 볼 것이다.

카페 앞에 주차된 승용차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차 안에서 시동을 한번 걸었다가 잠시 멈추었다.

통유리 너머로  창가에 앉은  그가 나를 보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래 오늘의 타이밍은 바로 지금이다.

나도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입꼬리를 올려 살짝 미소를 흘렸다.

그는 충동을 누르듯 갈증을 느끼는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 시선은 성적 판타지를 갈구하는 바로 그 표정이었다.    최고의 타이밍이었다.

10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그리움과. 애틋함과. 모호함. 신비로움.  그리고, 우수에 찬. 나의 시선은

그로 하여금 섹슈얼리티  감성을 자극할 것이다.


 고개를 돌렸다.

 차에 시동을  걸었다.


 후진을 하던  승용차는 그에게 뒤꽁무니를 보이며 멀어져 갔다.

그는 잠시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 가는 나를 아련하게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차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자. fm라디오를 켰다.

오늘 티타임도 낭만적이었다.  

그때 딸아이의 전화가 울렸다.


" 엄마 도대체  아침부터 어딜 간 거야?  집구석은 엉망이고 밥도 안 해 놓고.  정말 이러기야?

아빠가  어제 외박했다고 진짜 이렇게 보복하는 거야.

 나는  뭔 죄야 밥은 해놔야 할 거 아냐

아빠가 잘못했는데  왜 내가 피해를 입느냐고?"

딸아이의 잔소리를 듣다가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끊는다.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자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몇 분째 4차선 거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다.

핸드백에서 샤넬 넘버 5를 향수를 꺼내 가볍게 한번 펌프질을 했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멀리서 보이는 두 번째 카페에서 점심을 혼자 먹기로 했다.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신선 하게 느껴졌다.


하늘을 보면서 숨을 들이쉬다가. 옆에 정차해 있는

중년의 남자와  순간 눈이 마주쳤다.  


 검은 목폴라 스웨터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창문을 내리고 차창에 팔걸이를 하고 앉아 있었다.

 남자가 깊은 눈으로 빨려들이듯 나를 보았다.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행동강령을 잊고 그를 계속 쳐다보았다.

그때 그가 고개를 돌리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차창을 서서히 올렸다.

 검은 유리 사이로 그의 얼굴이 서서히 사라졌다.


나는 그때까지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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