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빠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달리기 이야기

4번째 편지, 레이서(racer)도 좋지만, 페이서(pacer)가 되자

by sposumer

사랑하는 원이야,

지난 토요일에 너는 아빠랑 엄마랑 소아과에서 예방접종을 했어. 네가 주사를 맞고 나면 당연히 울 거라고 생각했지. 울면 어떻게 달래줄 것인지 아빠는 혼자 고민도 했어. 그런데, 너는 주사를 맞고도 울지 않더구나. 의사 선생님도 울지 않는다고 신기해하셨어. 또, 엄마는 산부인과에 산후 검진 예약이 있어서, 아빠랑 둘이 집으로 올 때도 울지 않았어. '신통방통'이라는 말은 이런 때 쓰라고 있는 것 같구나.

지난주에 아빠는 러닝 잡지인 한국판 '러너스월드(Runner's World)'에서 진행한 인터벌(interval) 훈련에서 참가해서 달렸어. ('인터벌 훈련'이 뭐냐고? 일정한 거리를 달리기 힘든 페이스로 달리다가 천천히 달리기나 걷기를 하면서 휴식을 취하는 훈련 방법이지. ) 아빠는 참가자 중 한 명으로 달린 것이 아니라, 페이서로 참가했어. 지난번에 페이서가 어떤 사람인지는 설명을 했었지? 인터벌 훈련은 A, B, C조 3개 그룹으로 나누어 진행했는데, 아빠는 C조 페이서였어. C조는 1km를 4분 50초 페이스로 달리는 그룹이었지. 한 바퀴가 477m인 운동장을 10바퀴 도는 거니까, 5km가 조금 안 되는 거리라서 아빠에게 무리한 페이스는 아니었어. 그래도 페이서를 한다는 것은 좀 부담스러운 일이란다.

혼자 달릴 때는 페이스를 놓치는 것은 혼자 만의 문제지.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의 페이스를 이끌어주는 페이서가 페이스를 놓치면, 페이서를 믿고 달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피해를 줄 수가 있어. 물론 페이서가 정해진 거리를 정확한 시간에 달리면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지. 좋은 페이서는 뒤돌아보지 않고, 혼자 달리는 사람이 아니야. 함께 달리는 사람들이 모두 결승점까지 원하는 기록으로 완주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해. 시간 맞춰서 달리기만 해도 바쁘지만, 뒤쳐진 사람이 있다면 격려해서 끝까지 함께 달리도록 해야 좋은 페이서란다. 이렇게 페이서는 자신이 아니라 함께 달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달려야 하는 사람이야.

러너를 흉내 내는 사람들이 제일 위험하다. "더 빨리 병"에 걸려,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걸 성취하려고 들며 다른 사람들과 언제나 경쟁하고 이기려고만 드는 사람들 말이다.
조지 쉬언 <달리기와 존재하기> 중에서

아빠는 젊었을 때는 늘 최고 기록을 세우는 레이서가 되고 싶었어. 3시간 안에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는 서브 쓰리(Sub 3)도 해보고 싶어서 열심히 훈련도 했지. 하지만, 서른 중반이 지나서는 레이서보다 페이서가 되고 싶어 졌어. 젊었을 때는 혼자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지 않더구나.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고, 누군가를 도와주는 것이 사람 사는 방법 같아. 페이서는 같은 목표를 가진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사람이야. 함께 달려서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쉽지는 않을 거야. 그렇지만 페이서로 목표를 달성했을 때는 혼자 달려서 목표를 달성했을 때보다 훨씬 큰 기쁨도 누릴 수 있겠지?


지난주 수요일, 반포종합운동장으로 러너스월드 인터벌 훈련 리허설을 하러 갔어. 아빠는 1988년부터 거의 20년을 구반포에서 살았어. 반포종합운동장 바로 옆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녀서, 반포종합운동장에서 농구랑 축구도 많이 했지. 반포종합운동장 트랙에서 달리는 것이 낯설지 않았지. 그렇지만, 페이서로 달린 것은 처음이었단다. 1km 4분 50초 페이스는 아빠가 평소에 달리는 것보다는 조금 여유 있게 달리면 되는 페이스야. 이론적으로는 그래. 그렇지만 달리면서 이 페이스를 실제로 유지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어. 반포종합운동장 트랙을 3바퀴째 돌고 나니 대략 페이스를 맞출 수가 있게 되었지. 그렇지만 금요일에 진행되는 러너스월드 인터벌 훈련 때는 대략적으로 페이스를 맞추면 안 되니까, 걱정이 좀 되더라. 그래서 고전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어. 아빠는 현재 달리는 페이스를 볼 수 있는 손목시계를 차고 있지만, 여기에 의지하지 않고 총 달린 시간을 확인하는 방법으로 페이스를 맞추기로 했어. 이렇게 하려면 트랙을 한 바퀴 돌 때마다 목표로 하는 시간을 알 수 있어야 하니까, 이 목표시간을 왼쪽 손목 안쪽에 네임펜으로 적어두었지.


한 바퀴마다 해당하는 목표 시간을 적은 아빠의 손목 안쪽

금요일 저녁 인터벌 훈련 때, 아빠는 이 방법으로 페이서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어. 반포종합운동장 10바퀴를 돌아서 온몸이 땀범벅이 되었지만, 함께 달린 C조 분들과 서로 수고했다는 인사를 나누니 참 기분이 좋더구나.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문득 레이서가 아닌 페이서로 목표도 생각을 해봤어. 아빠는 시각장애인 러너들의 페이서가 돼보고 싶어. 차량 통행이 금지된 남산공원 북측순환로에 가면 시각장애인 러너들과 페이서들을 볼 수 있어.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달리는 시각장애인 러너들도 대단하지만, 이 분들을 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페이서들은 정말 베테랑(veteran)이란다. 이 분들은 시각장애인 러너들과 한쪽 손목을 끈으로 묶고서 달려. 이것 자체도 힘든데, 달리면서 발소리와 숨소리 만으로 페이스를 예측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지. 이 정도 실력이 되려면 자기가 달리는 페이스는 거의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정확한 수준이어야 해. 또 달리면서 산책하는 분들께도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 "지나가겠습니다!" 소리까지 지르며 달려야 하니까, 정말 힘든 달리기를 하시는 거야. 아빠는 아직 시각장애인 러너들을 위한 페이서를 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하단다. 그렇지만 꾸준히 달려서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단다.

주말 오후에 너를 유모차에 태우고 강동구청 앞 잔디밭으로 산책을 나가면, 뛰거나 킥보드를 타는 아이들이 많아. 대부분 저기까지 누가 먼저 달려가나 시합을 하고 있지. 아이들도 1등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해. 아빠도 어렸을 때는 뭐든지 늘 1등이 하고 싶었어. 너도 걷고 달리기 시작하면 친구들 사이에서 제일 빠른 사람이 되고 싶을 거야. 친구들과 달리기를 할 때는 페이서처럼 달릴 필요는 없단다. 그렇지만, 친구들과 달리기를 하다가 넘어진 친구가 있다면 내버려 두고 가지는 마. 때로는 1등보다는 함께 가는 것이 더 기쁘고 가치 있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2017 BMW 달라스 마라톤 여자부 우승자 결승선 통과 모습. (사진 출처: BMW Dollas Marathon)

위에 사진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하겠지? 작년 12월에 미국에서 열린 BMW 달라스 마라톤에서 여자부 우승자인 챈들러 셀프(Chandler Self)가 결승점을 200야드(yard, 약 183m) 앞두고 넘어졌어. 이 모습을 본 마라톤 릴레이 부문 참가자인 아리아나 루터만(Ariana Luterman)이 챈들러를 부축해서 결승선을 통과하도록 도와주었지. 달리다가 넘어진 선수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안 되지 않냐고? 맞아. 하지만 대회 조직위원회는 챈들러의 우승을 인정했어. 챈들러를 뒤따르는 여자 2위 선수와 격차가 너무 컸기 때문이야. 아빠는 아름다운 결승 통과 장면을 만든 아리아나가 우승자인 챈들러보다 더 멋져 보이더라. 그렇지 않니?

이제 7월 중순이라서 날씨가 덥구나. 그래도 아빠는 시각장애인 러너들의 페이서를 목표로 선선한 새벽에 꾸준히 달리도록 노력할게.


사랑하는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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