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미 수상자다

비로소, 가족으로 충만해졌다

by 봄아범


학원 출석부를 한참 바라보았다. 내 이름 뒤에 알파벳이 있었다. 김지현A. 김지현B. 나는 아메바가 아닌데. 이분법으로 분열된 건 아닐까 싶었다. 수업이 시작되었다.


김지현A!


‘네.’라고 대답하는 남학생과 여학생의 화음이 교실을 울렸다. 낯선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그날 처음 피부로 느꼈다. 나의 이름은 흔할 수 있다는 것을. 남중을 졸업하고 남고를 다니고 있었기에 ‘지현’이라는 이름은 내가 유일했다. 초등학생 때 브라운관에서 바깥쪽 엉덩이를 두드리며 ‘싸바~ 싸바~’를 외치던 혼성그룹 룰라의 멤버 외에는 없었다. 또 다른 김지현과 같은 공간에 있자니 기묘했다. 그날부터 내 별명은 지현삐. 삐콤씨. B사감. B사이로막가. B나 삐로 시작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렇다. 심지어 나는 김지현B였다.




‘지난 2024년 발표된 최신 암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은 기대수명까지 살면 남성 37.7%, 여성 34.8%가 암에 걸릴 확률이 있습니다. 또한 암은 여전히 주요 사망 원인입니다.’


라디오 정오 종합 뉴스로 읽는 문장은 청취자들에게 전하는 업무일 뿐이었다. 열 명 중 네 명 가까이가 암에 걸릴 수 있음을. 그게 우리 가족일 수도 있음을. 아니. 나일 수도 있음을. 어머니의 치료로 암병동을 찾고 나서야 알았다. 대형 병원은 입원 접수 대기부터 남달랐다. 접수창구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분명 우리 차례가 되었는데, 대기 번호가 뜬 창구가 없었다. 열 걸음 정도를 빠르게 걷고 나서야 접수창구에 다다를 수 있었다. 어머니는 허둥지둥 따라오고, 아버지는 멀찌감치 서 있었다. 행동양식은 달랐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였다. 이게 무슨 일이야. 암과 싸우는 당사자도. 환자 가족들도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악성 종양 판정을 받은 순간은 비극이었다. 자궁을 드러내고 찾아온 두 번째 암이었으니까. 다음부터는 사람으로 정신이 없었다. 밀려드는 예약 문의로 지쳐 보이는 간호사. 3박 4일은 머물 것처럼 보이는 캐리어를 든 여성. 접수를 못해서 창구직원과 고성을 주고받는 중년 남성. 접수 후 수술대에 들어가기 전 병상에 누운 환자. 방역 상황으로 한 명만 허락된 보호자. 그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인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마스크로 얼굴을 잔뜩 가린 부모님을 에스컬레이터로 올려 보냈다. 입원수속을 밟으면 더 많은 사람을 만날 두 사람을 떠올렸다. 발에 채일 정도로 많은 환자들 중에 우리는 몇 번째일까. 고등학생 때 다닌 내가 김지현B였다면, 지금의 나는 암 환자Z의 아들일까. 알파벳이 26개인데, 몇 바퀴를 돌아야 우리를 명명할 수 있을까. 이왕이면 성씨를 딴 B나 K가 좋겠다. 암병동에 있는 열 명 중 네 명 꼴인 사람들 틈으로 멀어지는 부모님. 환자 가족K와 암환자B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글을 쓰는 손을 쉽게 움직이기 어려웠다.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응모 마감을 일주일 남짓 앞둔 주말. 나의 당선 가능성은 얼마나 될지 조바심이 났다. 가난하게 자란 유년기. 암을 버틴 어머니. 결혼 후에도 계속되는 욱하는 성격. 그로 인해 아파하는 가족들. 나와 아내, 아이를 살리기 위한 노력. 그간의 시간을 연재로 풀어낼 때는 유일한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글을 살펴보았다. 1기부터 4기까지. 첫 경험부터 각종 부위에 찾아온 종양까지. 암 환자의 숫자만큼이나 병마를 소재로 풀어낸 글이 많았다. 10대 때 출산하고 시집살이를 모질게 겪은 여성. 아이에게 화를 내고 반성하는 스토리. 육아와 가족 에세이도 남부럽지 않게 주를 이뤘다. 셀 수 없이 아픈 사람들 속에 나의 문장이 보였다. 그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 작아졌다. 서울시에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겪는 가난과 아픔을 끄적인 가족에세이K는 선택받을 수 있을까.




그저 하늘에 맡겨드리는 거죠. 뭐.


후배의 담백한 답은 내 마음에 담뿍 물을 주는 말이었다. 경력사원으로 뽑힌 후배 S에게 면접 때 마음이 어땠는지 물었다. 그녀는 이전 직장에 사표까지 낸 절박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채용 전형을 대하는 마음은 담담했다고 고백했다. 면접관과의 대화뿐 아니라, 입사 후 새롭게 시작하는 아침 출근길 프로그램 제작도 같은 마음이었다.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은 단순했다. 그저 앞에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수행하는 것. 나머지는 그날의 분위기와 하늘에 맡기면 그뿐이라는 태도. 합격자 발표 문자를 확인하고 기뻐하던 14년 전의 내가 겹쳐졌다. 당시 나는 수많은 지원과 면접에서 나와 맞는 회사와의 만남이 기뻤다. 환희를 누리기까지 자기소개와 신문 스크랩, 작문, 프로그램 진행을 묵묵히 준비했다. 그날의 나를 닮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다음날, 이른 새벽에 눈이 뜨였다. 노트북 앞에 앉아서 문장을 채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성장이었다. 그저 환하게만 웃는 아내는 엄마로 한 뼘 자랐다. 그 성장이 눈부셨다. 두 사람 덕분에, 매직 카펫 라이드를 탄 것 같은 기분으로 눈물을 훔치고 조명 앞에 섰다. 왕자가 되어 자스민 공주의 손을 잡은 ‘알라딘’처럼.’


자스민 공주였던 아내가 많이 웃고, 많이 울었다. 그동안은 나 혼자만의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눈물은 나의 문장을 우리의 성장기로 만들었다. 덕분에 전체 알파벳을 서른 바퀴쯤 돌고 나서야 순서가 주어졌던 나의 가족에세이K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서사가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름 뒤에 알파벳을 떼고 온전히 당신의 모습으로 기록에 남았다. 나 또한 A도 B도 아닌 인간 김지현으로 글 안에 바로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미 상을 받았다. 수상소감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아내와 아이가 아침상에 앉아 나를 바라본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서로가 서로를 꽈악 안아준다.


* 제 13회 브런치북 프로젝트 대상 수상자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전합니다. 선배님들 가신 길을 성실하게 따라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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