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망울이 말해준 오늘

by 윤슬

길을 걷다 우연히 마주친 장면 하나가 마음에 오래 남았다. 작은 강아지가 보호자를 올려다보며, 단 한 번의 눈맞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 여기 있어.’ 그 말이 눈동자에 맺혀 있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믿고 서 있는지 멀리서도 또렷이 읽혔다.


그러나 보호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바쁘거나, 잠깐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겠지. 그 순간 강아지에게는 주인의 따뜻한 눈빛 하나가 세상에서 가장 절실한 행복이었을 텐데, 그 마음이 닿지 못하는 듯해 안타까웠다. 축 내려간 꼬리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반짝이는 눈물, 발끝의 미세한 떨림이 내 시간으로 들어왔다.


나는 걸음을 늦춰 그들 곁을 조용히 지나쳤다. 단단히 굳은 보호자의 어깨, 그 너머를 한없이 바라보는 작은 눈. 한쪽은 가득 찬 마음을 확인받고 싶어 하고, 다른 한쪽은 그 마음을 모른 채 바람처럼 스쳐갔다. 사랑은 대개 그렇게, 아주 작은 틈에서 시작되어 아주 작은 틈으로 새어 나간다.


그 장면을 지나오며 문득 생각했다. 길 위를 스쳐 지나는 동안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신호를 놓치는지. 강아지가 보내는 미세한 떨림, 친구가 건네는 한마디, 사랑하는 이의 눈빛 한 번. 소중한 것들은 으레 소리 없이 다가와 슬며시 옷자락을 잡는다. 다만 우리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않을 뿐이다.


우리는 자주 과거에 묶이고 미래를 걱정하다가, 지금을 놓친다. 이미 지나간 일의 그림자와 아직 오지 않은 일의 윤곽이 마음을 번갈아 흔드는 사이, 현재는 조용히 뒤로 밀려난다. 하지만 우리가 느끼고 웃고 사랑할 수 있는 건 언제나 이 순간이다. 손에 잡히는 시간은 ‘지금’뿐, 그 밖의 시간은 결국 기억이거나 상상일 뿐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The present is a gift. 지금은 정말 ‘선물’이라고. 선물은 받는 순간에만 열린다. 미리도, 나중에도 아닌 바로 그때에만. 지금이라는 상자를 앞으로만 밀어두면, 선물의 리본은 저절로 풀리지 않는다.


오늘 길 위에서 마주친 작은 아이의 눈빛은 내게 선물의 그 리본을 바로 지금 풀어 보라했다. 눈맞춤 한 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요구. 존재를 온전히 바라봐 달라는 아주 단순한 청. 우리는 대개 더 큰 말, 더 확실한 증거를 기다리다 보석처럼 빛나는 짧은 순간들을 아쉽게 놓친다.


행복은 대단한 사건이 아니라 방 안의 온도처럼 살짝 올라가는 감각에 가깝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낮아지는 때, 문턱 너머로 스며드는 바람의 냄새, 머그컵에서 피어오르는 김. 그런 것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마음은 천천히 풀리고, 오늘은 기꺼이 내어 줄 만큼 넉넉해진다. 그 넉넉함이 사랑이 드나드는 문이 된다.


강아지에게 주인의 눈빛 하나가 전부이듯, 우리에게도 서로의 존재가 그런 시간들이 있다. 말보다 먼저 건네지는 작은 신호들, 반걸음 가까워지는 몸의 각도, 대답 삼아 피어나는 짧은 미소. 그 모든 것이 지금만 허락되는 방식으로 우리 앞에 놓인다. 그래서 현재는 선물이다. 펼쳐 보이는 순간에만 진짜가 되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연습한다. 고개를 자주 들자. 오늘이 묻는 질문에 바로 대답하자.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면, 그 시선이 머무는 자리로 눈을 돌리자. 작은 존재의 요청에 ‘나도 여기 있어’라고 답하자.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멈추고, 바라보고, 들어주면 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오늘을 한 번 더 열어 보았다. 낮게 깔린 빛, 멀리서 들려오는 강아지 짖는 소리, 나뭇잎이 닿아 내는 얇은 마찰음. 사소한 것들이 순서 없이 밀려와 자리를 잡는다. 그 사이에, 조금 전 그 아이의 눈동자가 다시 떠오른다. 작고 진실한 검은빛. 말 대신 전해지는 확신.


그 확신은 우리 에게 말한다. 이 순간을 느껴라. 너와 내가 서로를 온전히 비추는 바로 지금을. 한 번의 눈맞춤으로도 사랑은 충분히 오고 갈 수 있다고. 그래서 나는 안다. 우리가 느끼고 웃고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행복이며, 오늘이 내게 건넨 선물이라는 것을.


지금을 열어 주는 건, 눈빛 한 번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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