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퇴사 이유를 물으면 "비전이 없어 회사를 그만뒀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곤 했다.어떤 비전? 내가 원하는 비전이라는 게 있었을까? 맞다. 비전이 없어 회사를 그만뒀다는 건 핑계였다.
지독한 자기 합리화이자 남들에게 에둘러 말할 수 있는 그럴싸한 이유. 나도 그런 게 필요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어떤 한 가지 이유가 지독하게 나를 그곳에서 내쫓은 것도 아니었고, 모든 게 다 싫어 도망 온 것도 아니었다.
당신은 왜 우리 회사에 입사를 결심하게 되었나요?
한 회사는 사표를 손에 쥔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이 질문을 한다고 한다. 당신은 왜 우리 회사에 입사를 결심하게 되었나요? 이 질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담당자와 몇 번의 이야기를 나눈 뒤 사표를 철회한다. 왜 그런 걸까? 초심으로 돌아가서? 아니면 그때의 절실함이, 또는 그때의 포부가 생각나서?
그럼 나도 한 번 과거로 돌아가 볼까? 취업에 필요한 토익과 토익스피킹, 전공 관련 자격증, 그리고 자기소개서에 쓸 대외활동을 위해 1년 반을 휴학한 후 다시 4학년으로 돌아간 그때로, 졸업 전에는 취업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서류 심사에서만 100군데 떨어지고, 인적성도 내내 떨어지고, 말끔한 정장에 높은 구두를 신고 열심히 면접장을 돌아다녔던 그때로.
'아쉽지만 당신과 함께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건 마치 힙합 오디션 탈락 멘트와 다를 게 없다.) 그렇게 탈락하고,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질 때 나는 좌절할 시간도 없었다. 또 다른 오디션을 준비해야 했으니깐.절실함이 부족했다고? 아니다. 그 누구보다 절실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탄탄한 스펙을 쌓았다고 자부한다. 학교와 전공은 바꿀 수 없으니 취업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다. 어디든 큰 기업에 가고 싶었다. 이왕이면 전공을 살려서 내가 클 수 있는 곳으로. 그런데 내가 바랐던 게 컸던 것일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 회사는 그런 나에게 마지막으로 내려온 동아줄과 같은 곳이었다.입사를 결심했던 이유? 솔직히 말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당시 내가 갈 수 있는 상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돌이켜보면 그때는 그랬다. 그래서 이곳을 선택했고 그 선택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퇴사 전, 입사 동기를 다시금 생각해보는 건 좋은 방법이다. 이 회사에 입사할 땐 그렇게 절실했는데 그래도 퇴사하시겠습니까? 다시금 생각하면 뭔가 주춤하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 퇴사하겠습니다."
퇴사 이유 1위 상사 갑질
그리고 연령별 퇴사 이유: 20대 적성, 3,40대 돈, 50대 퇴사 압박
입사 후 나를 돌이켜 보자.회사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보다 더 큰 책임감과 능력을 요구했다. 그건 회사가 아닌 바깥세상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란 걸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도망가고 싶었다. 내가 맡은 프로젝트를 성공할 자신이 없었고, 나는 많이 지쳐있었다.
사람 관계도 어려웠다. 프로젝트에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현장 직원들은 나에게 쪼르르 달려와 불같이 화내며 따졌다. 평소에는 하하호호 웃으며 농담을 건네던 사람들이, 나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때마다 무서웠다.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일적으로 사이가 틀어지니 자연스럽게 사적으로도 서먹해졌다. 같은 편인 줄 알았는데 문제가 생기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 마치 다른 편인 것처럼 "적" 같이 행동했다. 회사의 이윤 창출, 더불어 나의 안위, 라는 같은 목표를 가진 적. 회사에서 네 편, 내편으로 나누는 것도 우습다. 그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물론 퇴사 이유는 그 한 가지만으론 충분하지 않다.
그게 좀 컸다는거지 그것 말고도 여럿 이유가 더 있다. 하지만 더 구구절절한 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하고자 한다. 결론은 도망쳐온 것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으니깐. 어떻게 변명을 해도 그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원인을 분석해보자. 나는 의지가 부족했고 용기가 부족했다. 핑계를 대자면 나는 무엇을 위해 그것을 해야 하는지 몰랐다.그리고 필요 이상으로 모든 사람과 잘 지내고 싶어 했다. 미움받는걸 극히 두려워했고, 확고한 줏대가 없어서 이리저리 휘둘렸다.귀도 얇았다. 내 옆에는 늘 이직하고 싶다며 퇴사 노래를 부르던 직장 상사가 있었다.아니, 직장 사상'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첫 회사라 나에게 뚜렷한 기준이 없던 것도 한몫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상사는 몇 년이 지난 지금도 착실하게 그 회사를 다니고 있다.그렇게 다들 힘들어도 꾹 참고 사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일인지모르는 지경에 왔다는 것. 잘하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앞으로 잘할 자신도 없었다. 의문이 들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하기 싫은 이유가 너무 크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밸런스가 중요한데 왜 하는지도 모르는 내가 그걸 알겠는가.
20대는 적성이 맞지 않아서, 3,40대는 돈이 적어서, 50대는 퇴사 압박으로 퇴사를 고민한다고 한다. 그게 과연 절실함이 부족해서일까? 그들이 그저 배부른 소리를 하는 것일까?
난 절실했다. 그런데 그 절실한 대상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취업 준비생에게 절실함은 의무였다. 절실함이 있어야 취업이 된다고 생각하니깐 왜 해야 하는지 모른 채 그냥 허공에 대고 절실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해야 하는지 알아야 정확한 절실함의 과녁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야 의지가 생기지 않을까?물론, 인정한다. 배 부른 소리라는 걸. 그 뒤로 한참을 후회했으니 어려서 그랬다는 것도 인정한다.그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도 절실한 무언가를 찾아볼 시간을 가져보자.목적 없는 취업 준비 말고, 그저 쉬거나 드라마를 몰아보거나 훌쩍 여행을 떠난다거나 그런 거 말고! 내가 미련 가지고 있던 일들을 하나씩 소거해가는 시간,그러면서 내가 진짜로 되고 싶은 절실한 대상을 찾아볼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