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소리마저 들려올 것 같은 적막이 흘렀다. 마지막 한 명까지 사무실에서 나가고 남은 건 나 하나였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긴 순간들이 흐르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짐을 챙겼다. 반 정도는 챙기고, 나머지 반은 그대로 두기로 한다. 필요한 게 딱 반이었기 때문. 사무실 창문 사이로 본 바깥세상은 이미 어둠이 찾아온 지 오래다.
입사 첫날, 문을 열고 들어와 떨리는 마음으로 이 책상에 앉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책상을 한 번 쓰다듬는다. 그간의 나의 흔적들을 손으로 느껴본다. 괜히 뭉클하다. 그동안 참 애썼구나. 조금 더 잘 해내지 못한 내가 밉고, 또 그런 나에게 미안하다.그 미안함에소리 내어 울진 못했지만, 마음은 울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다. 돌아선 마음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그간 참아왔던 모든 성을 무너뜨리는 데는 10분이면 충분했다. 나는 가슴에 품어왔던 사표를 그렇게 겁 없이 내던진 것이다. 나조차도 감당하지 못할 포기였다. 두 손 두 발 다 들고, 빈털터리로 그렇게 도망쳐 나온 것이다.
후련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집으로 가는 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벗어던진 책임감만큼 가볍지 않았다. 탓하고 미워할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저 혼자 덩그러니 남은 기분이 들었다. 나의 퇴사는 그랬다. 뒤처리는 나의 몫이 아니었다. 나는 왜 그렇게까지 퇴사에 목말라있던 걸까.
너의 사수를 보아라. 그게 너의 미래다. 적어도 이 회사에선.
이 얼마나 무서운 얘기인지 모른다. 예를 들어보자.
나는 나름 큰 중견기업에 다녔고, 연구팀 소속이었다. 그런 우리 팀에는 여러 유형의 상사가 존재했다.입사 동기는 다 과장, 차장인데 그다지 능력이 없던 만년 이 대리는 후배들에게도 늘 험담 거리였다. 능력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상사가 시킨 일은 모두 후배에게 떠넘기고, 몰래 숨어 잠을 자거나 시간을 때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다 일이 잘 풀리면 모두 자기 공으로 돌리기까지하니 얄미운 짓은 골라서 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사의 연줄로 입사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얼마나 무능했으면 그런 소문이 돌았을까.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은 아니겠지? 아무튼) 저게 내 미래라고 생각하면 고개를 격하게 내젓고 싶다.능력 없는 사람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면 회사에서 촉망받는 박 과장은 어떤가.굳이 자신의 시간을 내어 후배 양성에도 힘을 쓸 뿐만 아니라 일도 척척 잘하니 선배의 사랑도 한 몸에 받았던 박 과장.그래, 저 정도면 꽤 괜찮지 않을까. 늘 칭찬만 받고, 일도 척척해내니 회사 다닐 맛이 나지 않을까?
과장님은 월요병 없죠?
우연히 만난 지하철 안. 사람들은 꽉 찼지만 마치 독서실에 온 마냥 고요한 월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마음에 품었던 질문을 드디어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그 얼마나 어리석은 질문이었는지 모른다. 자유롭게 사는 지금도 약간의 월요병을 앓는데 박 과장이라고 예외였겠는가? 유치원을 다니는 나이부터 퇴사하는 그 순간까지 월요병은 치유하지 못하는 불치병과도 같다. 물론 박 과장도 피식 웃으며 아니라고 답했다.
"월요일 아침이면 제일 먼저 뭘 하는지 아니? 책상에 앉아'사람인(취업 포털 사이트)'을 뒤져봐. 그리고 이력서를 내지." 머리에 망치를 두들겨 맞은 기분이들었다. "이 회사를 쭉 다니면 승승장구할 수 있을 텐데요? 일도 잘하셔서 스트레스도 없어 보였어요."누구나 고충은 있다지만, 박 과장마저 이직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과장님의 이유는 다양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더 많은 봉급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아이 둘을 키우다 보니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안 받는 직장인이 어디 있겠냐며 반문하셨다. 일을 잘하니 더 많은 일을 받게 되고, 모든 일을 떠맡으니 부담감이 적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어차피 일도 많고 스트레스도 받는다면, 자유 시간은 좀 적더라도 봉급을 더 주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답했다. 어떤 이는 배 부른 소리 하고 있다고 핀잔을 줄지 모르지만, 각자의 고충은 그렇게 존재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먹고살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봉급을 받고, 딱 원하는 시간만큼만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런 일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좋아하는 것도 일로 만나면 고충이 있는 법인데 직장인들은 오죽하겠는가?
이 회사를 계속 다닌다면 나는 무엇이 되고 싶은가
음... 생각해보면 질문부터 잘못되었다. 회사 안에서 무엇이 되고 싶다니! 대리 아니면 과장이겠지. 또는 차장이나 부장, 능력이 있다면 이사가 되겠지.10년, 20년 그리고 부단히 노력해 30년 이상 버티고 버티면 차장이나 부장은 될 수 있을 것이다.결국 부장급이냐 이사급이냐 그게 문제인데 그걸 위해 동료들과 싸울 필요는 없다.우습지만, 그리고 모순되지만 난 이 대리가 되고 싶었다. 적당히 직급은 있는데, 힘든 일은 살살 피할 수 있는 눈치가 빠른 그런 이 대리 같은 사람. 어쩌면 그것도 능력이니깐.
"사수나 상사를 보아라. 그게 너의 미래다." 흔히들 하는 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말은 참 씁쓸한 말이다. 물론 나는 퇴사를 권장하고 싶진 않다. 행복을 찾아 떠나라는 말도 무섭다. 생계라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니. 퇴사를 하면 행복해질까? 물론 사람마다 그리고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하지만 나의 주변만 봐도 그렇다. 영원한 퇴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부를 더 한 후 이직을 하든 여행을 다녀온 후 이직을 하든 격하게 달라지는 건 없다. 보통의 경우엔 그렇다. 결국 같은 계열의 회사, 같은 계열의 직종을 선택하게 된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처럼 배운 게 그 일이니깐. 그리고 퇴사 후의 미래를 누가 책임져주겠는가. 퇴사 후 행복도 마찬가지다. 결국 내가 찾아야 한다. 버티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내 몫이고 내가 책임져야 할 사항이다.
그렇다면 사자와 호랑이가 제패하고 있는 정글에서 뛰쳐나왔던 나는 평화로웠을까? 노노. 아니다.어디에 가든 정글은 존재하고 나는 언제나 을이었다.도망쳐봤자 또 다른 사자와 호랑이가 존재하는 또 다른 정글일 뿐이다.또 다른 형태의 을일 뿐이라는 말이다.이 지긋지긋한 정글!이 지긋지긋한 갑을병정의 관계!
이 글은, 회사라는 정글에서 뛰쳐나온 겁쟁이가 또 다른 정글에서 살아남은 생존일기다. 앞으로 난 그 생존일기를 써보려 한다.번역가이자 여행칼럼니스트, 여행블로거이자 시민기자, 공모전 킬러이자 대외활동 달인이 된 한 프리랜서의 이야기! 이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