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 전화가 울렸다. 내 전화기에는 xx번역회사라고 적혀있었다. 이 회사는 늘 이렇다. 늦은 저녁이나 주말에 연락이 와서 급한 번역이 있는데 할 수 있겠냐고 묻는다. 초창기에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매번 거절하는 게 미안했고, 또 다음번에 일감을 주지 않을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꾹 참고 받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경력이 쌓이다 보니 그 정도 일은 거절할 짬밥이 생긴다.
자랑은 아니지만, 회사 다닐 때는 단 한 번도 주말에 회사에 가본 적이 없었다. 주말에 추가 수당을 주니, 더러 평일에 일을 다 끝내지 못하면 눈물을 머금고 출근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난 가지 않았다. 호랑이 같은 사수였지만, 그건 하나는 끝까지 지켜줬다. 게다가 내가 일한 카테고리는 다른 카테고리에 비해 일이 적은 편이었다. 운이 좋았다. 같은 팀 안에서도 난 운이 좋은 편이었다.
"프리랜서이면 시간에 구애 안 받고 프리하겠어요. 부러워요." 내가 프리랜서라고 하면 보통 이런 반응이다. 그러면 나는 "마감에 구애받아요."라고 답한다. 어떤 일이든 신뢰가 중요하다. 프리랜서는 더욱 그렇다. 마감을 잘 지켜야 한다. 다행히도 나는 마감을 어긴 적이 단한 번도 없다. 일단 일정이 확정되면 몸이 아파도, 상황이 안돼도 꾸역꾸역 해나간다.
그리고 주말에는 웬만하면 일을 받지 않는다. 평일에 일이 없어 쫄쫄 굶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말엔 일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주 5일을 준수하며 일을 하려면 기한을 길게 잡을 수밖에 없다. 만약 목요일에 일을 받았고, 4일간 할 분량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럼 일요일에 끝나야 정상이지만, 주말이 끼니깐 다음 주 화요일이 마감일. 의뢰인 입장에서는 속 터지는 노릇이다. 그걸 만회하려면 일을 엄청 잘하거나, 평일에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번역일은, 특히 초보자에게는 진짜 하기 싫은 주말이나 공휴일 또는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이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인데 시간이 없어 맡기는 거예요." 그런 경우가 많더라도 실제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대체 어떤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인 걸까? 나도 잘하지만, 그래도 맡겼으니 잘 해라는 뜻인가? 자기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걸까? 실제로 저 말을 들었을 때 어찌나 사기가 떨어지던지 단호박으로 일을 거절하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다.
예를 들어 내가 김치찌개를 잘 끓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서 회사 앞 김치찌개 집에 가서 김치찌개 하나 주문하면서, "제가 더 요리 잘하는데 제가 일을 해야 해서 시켜먹는 거예요."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비유가 어찌 되었건 난 그런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나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은 널리고 널렸다. 그래도 돈 주고 믿고 맡겼다면,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번역 퀄리티가 엉망이라서 화나서 하는 말이라면 인정! 허나 아직 작업물을 받아보지도 않았잖아!
어찌 되었든 주말에 일이 들어오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내가 해야 할일을 외주를 주었다고 가정해보자. 외주를 주었다고 해서 나는 손을 놓을 수 없는 노릇이다.
외주 업체에서 일을 마무리하면 담당자인 내가 최종 검토와 수정을 하게 된다. 근데 그 최종 검토를 일요일에 하고 싶진 않다. 회사에 있는 시간에 받아서 일처리를 하고 싶다. 그러니깐 외주는 주말까지 일을 끝내 놓아야 한다. 번역도 그런 외주 중 하나일 경우가 많다. 담당자가 평일 근무 시간에 일 처리를 하려면 외주는 늦은 밤이나 주말에 일을 끝내 놓아야 한다. 언제나 을, 또는 을 이하의 사람은 그걸 참아야 한다. 환장할 노릇이다.
그럼 야근은 어떤가. 밤늦게까지 일하다 보면 자연스레 다음날도 늦게 일어나게 된다. 그러면 또 그날 밤은 늦게 자게 되고 어느 순간 올빼미가 되어 축축 쳐져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도 직장인이 일어나는 시간에 일어나서 일을 시작하고, 직장인이 밥 먹는 시간에 점심을 직접 차려 먹고, 직장인이 퇴근하는 시간에 얼추 맞춰 일을 끝내 놓는다. 처음에 그 습관 들이기가 매우 어려웠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 낮잠 자지 않는 것. 그리고 업무 시간에 딴짓하지 않는 것.
회사에선 감시가 있으니 그게 가능한 일이지만 자발적인 착실한 삶은 참으로 힘들다. 하지만 그거만 잘 지키고 나면 일을 질질 끌지 않아도 되니 남들 일할 때도 눈치 안 보고 더 많이 쉴 수 있다.
물론 번역일을 절대로 주말에 받지 않다 보니 놓치는 일도 많다. 그건 매우 아쉽지만, 내 삶의 가치는 아직까진 돈보다는 나 자신이기 때문에 신념을 지키려고 한다. 일과 삶의 균형을 잡기 위해선, 뭔가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얻는 게 있음 잃는 것도 인정해야 한다. 모든 걸 다 가질 수 없는 게 세상이다.
돈이 많으면 시간이 없고, 시간이 많으면 돈이 없는 게 우리네 인생사 아니겠는가?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확신할 건 프리랜서는 생각만큼 프리하지 않다는 것. 그것이 직장인에게 위로가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