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봄단풍 May 09. 2024

만남

A씨 이야기

아내의 뱃속에서 커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가슴 벅찬 일이었다. 한 달에 한 번 경과를 지켜보기 위해 방문했던 병원을 이제 두 주에 한 번씩 방문하게 되면서 아이를 더 자주 보게 된 것이다. 아직 아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그것은 초음파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는 회색 덩어리일지언정, 의사의 말에 따르면 머리와 손, 귀, 발가락 등 사람다운 구색을 차근차근 갖춰가고 있었다.     


“심장 소리도 괜찮고, 좋아요. 얼굴을 좀 보고 싶은데. 어디 보자.”

“잘 안 보이나요?”

“지금 이쪽 각도에서 보시면 이렇게 나오거든요? 여기가 코. 보이죠? 이건 무슨 소리인가 하면 엄마 배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얼굴이 잘 안 보이네요.”     


하루하루 가슴이 벅차오르게 만드는 데에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의사의 설명도 한몫했다. 아내는 의사의 설명에 따라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탄성을 지르기도 했지만, A씨는 솔직한 말로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저 의사가 가리키는 것들이 코라면 코, 손이라면 손이라고 암기하듯이 외울 뿐이었다. 하지만 매번 들리는 엄청나게 빠른 심장박동 소리 앞에서는 그의 부족한 이해력이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개월 수에 비해 머리둘레는 조금 큰 편이긴 하네요?”

“혹시 이상이 있는 건 아니죠? 어디 아프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냥 조금 클 뿐이에요.”

 

다급하게 나선 A씨의 질문에 아내는 한참 동안 쿡쿡 웃었다.   

  

“진짜 귀엽다니까.”

“우리 애?”

“아니. 당신.”     


A씨의 아내는 슬슬 배가 불러오고 있었는데도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 의사도 굳이 쉴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었고, 본인도 직접 일을 더 하고 싶다고 말했지만 A씨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과는 별개로 죄책감은 나날이 더해가니, A씨는 그렇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통을 점점 키우고 있었다.     


“걱정 마요. 병원에서도 괜찮다잖아?”     


아내의 배도 서서히 불러갈 때쯤 A씨의 회사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정기 인사 공고 이후 일부 직원들의 근무처가 바뀐 것이다. A씨의 부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A씨를 포함한 다른 직원들은 그대로였지만, 기존의 부서장이 다른 곳으로 가고 그녀보다 젊은 사람이 새로운 부서장으로 왔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제가 집은 멀지 않은데 교통이 좀 막혀서 출근은 좀 늦을 수도 있으니까 양해 부탁할게요?”     


이전 부서장과는 달리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그녀는 큰 키에 머리를 짧게 자른 여자였다. 사십 대 초반에 처음 부서장을 맡았었다는 그녀는 이제 사십 대 중반에 달하는 나이였음에도 항상 경쾌한 발걸음과 높은 톤의 목소리로 사무실에 활력을 불어넣곤 했다. 다만, 그 활력이 가끔은 다른 부서의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같은 부서 팀원을 힐난하는 데에 쓰여서 오히려 분위기를 얼어붙게 만들기도 했다.    

 

“어머, A씨 와이프가 임신했다고? 어유, 집에 가서 잘해야겠네. 와이프 잘 챙겨 줘. 직장은 다니나? 집은 뭐야, 전세야 자가야? 어딘데? 전세? 얼마야? 뭐긴 뭐야, 당연히 전세금이지. 아니, 뭐 우리 사이에 그 정도 얘기도 못 해?”     


활력이 넘치는 것까지는 취향의 영역일 수 있었으나, 가끔 이렇게 필요 이상의 정보를 요구하는 것은 A씨를 피곤하게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결혼은 안 해봐서 모르지만, 아내한테 잘해줘. 내 주위에 결혼한 여자들이 많잖아? 비참하더라고. 육아가 얼마나 힘든 건데. 돈 관리는 누가 해? A씨가 해? 그냥 월급을 넘겨. 여자가 관리하는 게 훨씬 나아. 내 주위에서는 다 그렇게 하더라니까? A씨, 내 말 들어봐. 결국에는 남들 다 하는 대로 하게 되어있어.”    

 

도대체 새로운 부서장은 왜 이렇게까지 남의 일에 관여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혼 후에 어떻게 살든 부부가 알아서 정하는 것 아닌가? 자기 주위 사람들과 왜 똑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인지 A씨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지만 허허 웃으면서 대답을 피했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직장에서의 자리는 지켜야 했다.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임신한 아내를 두고 있는 A씨로서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이전 04화 제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