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들을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때다. 이리저리 조카들을 따라다니며 병원 구석구석을 탐방하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조카들과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던 나에게 물으셨다. ‘애들 엄마예요?’ 나는 늘 그렇듯 정해진 대답, ‘아니요.’를 내밀었다.
“어쩐지, 표정이 밝더라고.”
그렇다. 나는 표정이 밝다. 엄마가 아니기 때문이다. 엄마들은 아가를 낳고서 이전과 너무도 달라진 자신의 삶을 발견해야만 한다. 이건 결혼의 무게보다 더하다. 한 아이를 책임져야 한다. 어떻게 제대로 키워낼 것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엄마의 한마디 한마디가 아이의 하루하루에 쌓일 것이고, 아이는 그 하루하루를 먹고 자랄 것이다. 게다가 세상은 녹록지도 완전하지도 않다. 불완전한 세계에 누구보다도 귀한 생명체 하나를 덜컥 내맡겨야 한다. 책임감과 부담감이 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신의 많은 부분을 기꺼이 혹은 억지로 포기해야 한다. 시간이든 돈이든 그게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양보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양보를 했다고 해서 훗날 다시 내 자리를 양보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 참 불공평하다. 세상이 ‘내리사랑’이라는 말로 포장해 온 그 말 그대로 엄마들은 묵묵히 자식들에게 내리사랑을 실천한다. 자기 삶에서 ‘자기’가 차지하는 양이 줄어들면 삶의 중심이 ‘나’에서 이동하기 시작하고, 엄마라는 이들의 삶은 점점 자신의 중심이 조금씩 휘청거린다. 이제부터 엄마라는 사람들에게 자신이란 존재는 더 이상 세상의 중심이 아니다.
반면 결혼 안 한 이모들은 삶의 무게중심이 자신인 경우가 많다. 엄마들과는 사뭇 다른 삶이다. 가끔 주춤주춤 균형을 맞추지 못하더라도 곧 다시 제 삶의 중심을 찾아 복귀한다. 조카들과 시간을 보내고 종종 용돈을 주고, 선물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일은 많지 않다. 이모는 이모의 역할만 하면 된다. 부담감은 접어 두고 마음껏 예뻐하기만 하면 된다. 육아의 세계는 이모라는 자가 함부로 끼어들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저 들어설 때 들어서고 빠질 때 빠지면 된다. 딱 이모라는 이름에 주는 할당량만큼만 조카들을 사랑해 주면 된다.
하지만 나는 이모에게 허락된 할당량 이상으로 조카들을 사랑했다. 게다가 가족이라는 무대에서 나는 무대 뒤편 어느 한구석쯤에서 끊임없이 보조 출연자로 대기 중이었다. 나는 매번 주인공 대신 조연을 선택했다. 때로는 나 자신조차 그 선택에 수긍하지 못할 때가 있었다. 아무리 우연이라지만 조카들이 태어나자 직장을 관뒀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 가족이 편해지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물론 나를 선택해 줄 세상이 없어서 나 스스로 가족의 품 안에 얼씨구나, 안겼던 게 더 진실에 가깝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셈이다.)
여하튼 지난 십 년 가까이, 나는 조금 더 나를 위해 살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이모라는 자가 제 삶의 무게중심을 자기 자신에게만 두더라도 세상은 그녀를 크게 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위해 사는 대신 짧은 시간이긴 하였지만, 조카들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며 사는 대신 소중한 조카들을 몇 배, 몇만 배 더 사랑하며 살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내 삶의 무게중심을 조카들 쪽으로 옮기면 옮길수록 내 삶은 자꾸만 더 풍성히 채워졌다. 그리고 내 손은 자꾸자꾸 여백뿐이었던 내 삶에 글자들을 채워 나갔다. 이건 나 혼자의 힘이 아니라 조카들의 힘이었고, 조카들을 사랑하는 데서 나오는 힘이었다. 별 볼 일 없는 이야기가 점점 차오르며 풍성해지더니 이제 이렇게 한 편의 브런치북이 되어 간다.
백일의 기적이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백일쯤 되면 갓난아기들이 통잠(통으로 오랫동안 잠을 자는 일)을 잔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밤새 젖 달라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칭얼대며 어른들의 잠을 앗아갔는데, 드디어 아가들에게도 제법 사람처럼 잠이 드는 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도 이런 백일의 기적이 찾아왔다. 아가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백 일 정도 글로 풀어내다 보니 어느덧 스물다섯 개의 글을 발행했다.
백 일이 지나고 나면 아가들은 고개도 슬슬 가누고, 또 누군가가 앉혀 주면 저 혼자 앉아 있기도 한다. 그러다 얼마 후에는 여기저기 기어다니며 세상을 탐색한다. 이모인 나도 마찬가지다. '이모 사용법'이라는 글을 쓰면서 내 마음은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내 마음’이란 녀석은 이쪽저쪽으로 기어다니며 미처 보지 못했던 내 안의 새로움에 달려든다. 그러다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아주 조금씩이나마 깨닫곤 한다. 그렇게 브런치에 글을 쓰면서 내 마음과 내 두 다리는 벽을 짚고 스스로 일어날 준비를 한다. 처음에는 책상이나 탁자를 짚어야만 두 발로 선다. 하지만 주변에서 잡아 주는 손길 없이도 점차 저 혼자 걷는다. 한 발 한 발 떼는 게 스스로도 신기해서 히죽히죽 웃는다. 내가 과연 두 발로 혼자 설 수나 있을까? 알 수 없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망원경이 절실했던 적이 많다. 하지만 막연한 마음으로 내 미래를 점칠 시간에 나는 내 미래를 스스로 칠하기로 한다.
사실 나는 동생의 속도뿐 아니라 세상의 속도에서도 진즉 추월당했다. (물론 이것은 순전히 세상의 기준이다.) 백수 시절 나는 동생을 먼저 시집보냈고, 또 다른 백수 시절에는 동생을 통해서 새 생명들을 만났다. 그런데 그 백수 시절도 나에겐 정말 축복의 시절이었다. 늘 받기만 하고 세상에 뒤처지기만 하던 언니가 드디어 동생에게 보은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기 때문이었다. 조금은 ‘강제 육아’로 시작한 일이지만, 나는 그 강제 육아 덕에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났다. 정말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보는 것만도 아깝고, 생각만 해도 마냥 기분이 좋은 사람들. 그들은 바로 우리 쌍둥이 조카 녀석들이다. 그들 덕분에 나는 15년 가까이 하지 못했던 언니 노릇을 드디어 시작할 수 있었다. 이모가 됨으로써 나는 동생에게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았고, 내 인생에도 특별한 글을 선물할 수 있었다. 이모가 되지 않았더라면 가족을 더 깊이 사랑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을 것이고, 아기가 사람으로 거듭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사랑과 희생이 있어야 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이모가 되면서 점점 사람이 되어 간다. 어떻게 세상 속을 기어가고 어떻게 세상 위를 걸어가야 하는지 깨닫는 중이다. 조카들이라는 선물이 내게 왔기에 나는 이렇게 조금 더 열심히 세상을 배워 나간다. 아마 나는 앞으로 좀 더 배워야 하고 좀 더 넘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계속해서 조카들과 손을 맞잡고 힘차게 앞으로 앞으로 뛰어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이모의 운명일지 모른다.
세상 가장 빛나는 인연, 나의 쌍둥이 조카. 나는 오늘도 그들 덕분에 힘을 얻고 글을 얻는다. 여기 이렇게 글을 쓰면서 나는 다시 또 생각한다. 조카들로 인해 내 삶의 시계가 잠시 흔들린 것이 아니라, 내가 흔들리고 있을 때 조카들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꽉 붙잡는다. 그들을 꼭 껴안고 세상 속으로 함께 뛰어든다.
그렇다. 누군가의 말대로 나는 표정이 밝다.
단순히 내가 '이모'라서가 아니라, '사랑할 줄 알고 사랑받을 줄 아는 이모'라서 그렇다.
저기 멀리서 조카들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모오오오오.”
“이모오오오오.”
정말이지 나는, 내가 쌍둥이 이모라는 사실이 너무나 너무나 좋다!